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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Sep 09. 2023

E의 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읽고 또 읽었어요.”

부산에서 독자 E의 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구름을 걷어낼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다. 


그저 가끔 찾아오는 구름의 시간을 


함께 견뎌줄 사람

   신간 3종의 데이터를 검수하고 강의 자료를 준비하며 19일간 자정께 집에 집에 닿았다. 회계 정리와 업무 메일 발송, 번거로운 잡무를 정리하며 허둥대다 보면 반나절이 허무하게 끝나버리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구멍가게도 나름의 원리와 나름의 고충이 있다는 것은 출판사를 시작하며 알게 됐다. 새벽 일찍 밖을 나서서 늦은 저녁까지 깨어 있다고 해서 당장에 읽어주는 이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지난 계절들을 보내며 사무치게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무언가 기대하게 되는 건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작업실 통창에 왼쪽 어깨를 까맣게 그을리며 뜨거운 여름을 버텼다. 여름이 열기가 제법 가시기 시작할 때부터 9월을 기다렸다. 9월, 부산에서 참가하는 첫 페어 일정(2023 부산일러스트페어)을 이 여름의 고행의 끝처럼 여겼다. 오프라인 페어에 참여하는 날은 내게, 생일보다 더 생일 같은 날이다. 마치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크리스마스가 여러 날로 쪼개져 있는 것처럼 “아무렴 기쁜, 기쁘기로 작정한 날”이다. 홀로 쓰는 밤들도 결코 혼자는 아니었음을 확인하고야 마는 날, 몇 줄의 문장으로 어딘가에서 지속되고 있는 수많은 삶에 참여하고 있다는 황홀감을 맛보는 날. 그리하여 꼭 눈물을 보이고 마는 날이기도 했다.


   마감주간을 끝내고 도망치듯 부산으로 떠났다. 아침 6시 반에 출발하여 오후 4시가 돼서야 부산에 닿았다. 지난 피로와 책임은 털어내고 즐겁게 드라이브하듯 보낼 수 있었던 여정은, 갑작스럽게 발견된 데이터 오류와 외장하드 속에서 행방불명된 데이터로 인해 전혀 다른 모양이 됐다. 비행기 소리를 내며 급하게 펜이 돌아가는 노트북을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몇 시간을 보냈다. 호텔에 도착해서 보니 네모난 모양으로 허벅지 위가 붉어져 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찬란하던 부산의 한낮을, 리버뷰 호텔 방 안에 갇혀 보냈다. 부랴부랴 데이터 수정을 마치고 늦은 밤이 돼서야 페어가 열리는 벡스코에 도착했다. 새벽의 수산 시장처럼 피로하지만 열정 가득한 얼굴의 제작자가 자신들에게 허락된 공간을 부지런히 가꾸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구르마를 끌고 가 테이블을 조심스럽게 채웠다.


   직전에 참가한 페어는 6월의 서울국제도서 전이었다. 도서전은 2번째 참가였던 문장과장면들은 역대 최다 판매와 매출을 기록했다. 도서전을 찾아와 준 독자들이 두 세 바퀴로 테이블을 두르고 책을 데려갔다. 선물과 편지를 테이블 밑으로 차곡차곡 쌓으며 거짓말 같다는 말을 되뇌었다. 5일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가운데도 중간중간 노트북을 안고 밖으로 나가 일을 처리하고, 부족한 비품을 사기 위해 건물 밖을 빠져나와 달렸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흥건하게 젖은 등, 빠르게 뛰는 맥박을 가다듬고 다시 여유 있는 웃음을 준비하고, 테이블 앞에 서기를 반복했다. 그 결과 4킬로가 빠졌다. 그럼에도 통장이 숫자가 쌓이고, 우리 작가들의 기를 살려줄 수 있어 기뻤다. ‘계속 써도 되는 것인가.’ 하는 의심을 ‘계속 써야만 한다’는 의지로 바꿔주는 순간은 작업실을 벗어나야만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이곳 먼 부산에 닿았다. 집과 먼 이곳에서도 여전히 읽히고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일러스트 페어에 작게 둥지를 튼 출판 영역에 생소하게 반응하는 관람객들이 많았다. 이번에는 문학 책을 쓰는 출판사,라는 소개부터 다시 시작했다. 이곳은 책을 만드는 곳이며 우리는 이런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멈춰 서서 책을 읽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서 주저앉을 때마다 테이블 밑에 둔 수십 개의 책 더미와 눈이 마주쳤다. 도서만을 다루는 페어와는 성질이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부렸던 욕심에 웃음이 나기도 했다. 첫날과 둘째 날은, 지난 도서전에 1시간에 이뤘던 매출을 종일 매출로 기록했다. 기운이 빠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리하여 고마운 마음을 더욱 생생하게 감각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 먹지 않다가 맛본 소금에 짠맛 너머의 오묘한 맛을 음미하듯 가뭄에 단비처럼 닿았던 마음을 오래 음미하는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대구에서 올라온 독자 E님이 건네준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작가님을 읽고 또 읽었어요.”


   대구에서 올라온 독자 E님은 며칠 전에 블로그와 유튜브에 댓글을 다셨다. 손 편지를 쓰고 찾아가겠다고. 정신없던 시간이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제 오픈 후 잠시 자리를 비우고 돌아왔을 때 꼼꼼하게 책을 살피던 E님이 있었다. 독자와 작가의 관계는 신비롭다. 일면식이 없어도 눈을 마주치는 순간 깊은 대화가 시작된다. 독자 E님은 산책길에 발견했는 네잎클로버를 정성스럽게 코칭해서 편지와 함께 건네주셨다. 난생처음 받는 투박하고 소중한 진심이었다.


“작가님의 글을 알게 되고 작가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함께 느낄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일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다. 겨우 손가락을 움직여 문장을 잇는 일이 누군가의 걸음, 누군가의 손길을 얻게 한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그래서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었다는 그 말에 지금 내가 지나고 있는 그늘의 시간을 떠올렸다. 독자 E님이 가장 많이 읽었다는 나의 고백집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 수록글 ‘가끔, 구름’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구름을 걷어낼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다. 그저 가끔 찾아오는 구름의 시간을 함께 견뎌줄 사람”이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구름 낀 나날들이 우리를 
자꾸만 묶어두려고 하겠지만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다시금 해가 들 거다.

구름 아래에 있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구름을 걷어낼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다. 
그저 가끔 찾아오는 구름의 시간을 
함께 견뎌줄 사람이다.


저서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 수록글 '가끔 구름' 중 




   책이 많이 팔리면 좋겠지만, 긴 준비의 보람이 선명한 숫자처럼 찍혔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모름지기 가장 큰 기쁨은 다정한 말 한마디. 진심이 담긴 손길과 눈짓이면 나는 또 그 긴 밤들을 보낼 것이다. 기꺼이.



연재인의 한마디

목요일부터 내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2023부산일러스트페어>에 참여 중입니다. 반갑게 뜻밖의 만남으로 마주했으면 좋겠습니다.


https://naver.me/GienMSEl

도서 <고요한 세계에 독백을 남길 때>가 개정 신간으로 출간되었어요. 많은 사랑과 응원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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