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대 초반, 우연히 만난 p로부터 들은 질타
커다란 눈, 상대적으로 작은 동공, 뾰족한 턱과 살짝 올라간 입꼬리 탓에 종종 오해를 받았다. 긴장하는 탓에 웃음기가 사라지는 새 학기와 면접 자리에서는 더욱 그랬다. 겪어보기도 전에 평가하는 세상에서 차가운 인상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저지르지도 않은 실수를 수습하는 것 같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 송구스럽다는 듯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는 이제는 익숙한대도 불구하고 여전히 잊지 못하는 한마디 말이 있다.
2010년대 초반 늦겨울에 장문에 카톡을 받았다. 회유와 질책이 뒤섞여 있던 카톡창 끝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너는 내가 만난 누구보다도 겨울처럼 차가워. 네 앞에서 내가 자꾸 실수를 하는 건 사실이지만 일정 부분 네 잘못도 있다고 생각해. 너에게 상처를 받은 게 나뿐만은 아닐 거야. 앞으로도 만일 계속 그렇게......"
벌써 수년 전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그 애의 말을 외운 듯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조차 놀랐다. 어떤 말은 평생을 들어도 흩어지지만 어떤 말은 단 한 번 듣고도 평생 지우기 위해 애쓰기도 한다.
H와 나는 어느 모임 자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고성을 내며 술잔을 부딪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홀로 물 잔을 들어 올리다가 대각선 끝자리에서 사이다를 따르던 H와 눈이 마주친 것이 시작이었다. 외톨이가 외톨이를 알아보듯 시간이 흐를수록 시선 끝에는 H가 있었다. 내가 훔쳐보듯 그 애를 보았다면 그 애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뜨거운 난방, 사람들의 술기운에 정신이 아득해져서 바람을 쐬러 나가니 H가 서있었다. 줄담배를 피고 있는 사람들과 조금은 떨어진 자리에서, 여전히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마치 흔한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여기, 우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라고 말을 붙이는 것 같았다.
차가운 돌계단에 앉아서 H와 나는 그런 대화를 나누었다. 시끄러운 걸 참지 못하는 나와 낯을 가리는 H. 우리는 내키지 않던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한 서로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그리고 곧 함께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H는 보기 드물게 순수한 친구였다. 커다랗고 짙은 동공과 시원하게 웃는 입이 매력적인 H는 대체로 다정했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천진해서 나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갑갑한 지하 호프집에서 나를 구해준 H는 사라지고 없는 것만 같았다. 만남 시간에 자주 늦어서 나를 하염없이 기다리게 하고 한겨울인데도 늘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추운 날씨에 동상이 걸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H의 발가락이 그려볼 수 있을 만큼 친근해지기 시작하자 마음이 상했다. 늘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고백을 하면서도 "다음에는 꼭 운동화를 신고 왔으면 좋겠어."라는 나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맨발을 내놓는 그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쪼리 슬리퍼를 고집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을 때 "그냥, 슬리퍼 편하잖아." 라던 H에게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2시간이나 걸리는 먼 거리를 굽 낮은 단화 대신 높은 구두를 신고 오는 이유는 우리의 만남에 조금 더 마음을 다하고 싶은 것이라고. 그때 그는 쑥스러운 듯 고맙다는 듯 웃어 보이더니 그다음 만남에도 슬리퍼를 신고 나왔다.
H에게 더는 함께 걷고 싶지 않아 졌다고 이야기하게 된 게 엄동설한도 포기시키지 못한 그의 슬리퍼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천진한 말들이 종종 내게 예리하게 꽂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의 (이러한) 점이 좋아. 만일 (저러한) 점이 있었다면 좋아하지 않았을 거야." H의 화법은 달콤 살벌했다. 기분 좋은 칭찬에도 늘 옅은 긴장을 풀기 어려웠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날카로운 계산보다도 어리바리한 그의 어설픈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시절의 내게는 그 말들을 품을 만큼의 넉넉함이 없었다. 만나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퉁퉁 부운 발을 주무르며 H의 말을 곱씹던 저녁들이 늘어갈수록 나를 잃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H에게 썸의 끝을 알리게 되었다.
"넌 겨울 같이 차가워."
그의 뾰족한 말이 도착한 것은 나의 카톡을 읽은 H의 묵묵부답이 반가웠던 며칠이 지난 후였다. 늘 먼저 나와 그 애를 기다리고 꽁꽁 언 발가락을 걱정하며 손난로를 건네던 내가 겨울처럼 차갑다고? 발끈해도 괜찮을 말이었지만, 나는 의기소침해졌다. 차갑다는 말은 익숙했고 그 익숙함에 길들여진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풀이 죽은 채 지나던 늦겨울의 어느 오후였다. 매일 가던 도서관 벤치에 앉아 있는 내 곁으로 따듯한 해가 들었다. 찬바람에 차가워진 코끝을 매만지던 두 손을 활짝 펴서 햇살을 받치듯 들고 있었다. 꽁꽁 얼었던 손에 따듯한 기운이 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H의 말이 떠올랐다. 겨울 같이 차갑다는 말, 그 말에 대항하고 싶은 마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그리고 노트를 펼쳐서 적어 내리기 시작했다.
목도리를 칭칭 감고서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놓고서
한껏 움츠린 채로 문밖을 나서다
한줄기의 볕을 만났다
창밖으로 요동치던 나무들도 잠잠
건널목 벤치에 앉아
나른해진 눈을 감자
문득 떠오르는 얼굴들
겨울 역시 따스한 계절이었는지도 몰라
그 누군가에겐
봄에 가려졌지만
겨울 같은 사람들은
• 저서 <숱한 사람들 속을 헤집고 나왔어도>
수록글 '겨울 같은 사람들'
계절을 구석구석 산책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게도 따듯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안다. 봄볕보다 겨울볕이 더욱 반갑고 따듯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안도했다. 조금은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것 같다. 겨울 같은 사람이라는 말에 이불을 뒤척이며 보낸 불면의 밤은, 그날 오후에 건진 몇 줄의 문장과 함께 끝이 났다.
이제 더는 겨울 같다는 말에 울컥하지 않는다. 다만 봄에 가려졌지만 여전히 따스하고 다정한 구석을 품고 있는 겨울 같은 나를, 구석구석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의 볕 든 구석을 발견하겠다고.
지금의 당신은 어느 계절에 있나요. 한겨울에도 다정한 볕을 발견할 수 있듯이 우리의 계절에는 언제나 빛과 그늘이 함께한다는 것을, 사계절의 아름다움 속에 살아가듯이 당신에게도 새로운 계절이 당도할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추천하는 도서
저서 계절에세이 <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