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작가를 여전히 응원하는 S의 말
여전히 무명에 가까운 나지만, 한 줌의 빛도 보지 못해 깜깜하던 초보 작가 시절에 내게 ‘작가님’이라는 호칭을 가장 많이 불러준 게 S가 아니었을까. S는 그 시절 나의 어깨가 으쓱하게 해주던, (내 입으로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나의 빅팬이었다. (S가 아니라고 하면 어쩌지.)
8년 전 독립출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덜컥 첫 책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을 내놓은 나에게 S는 활짝 열린 문이었다. 내가 쓰는 어떤 이야기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그녀는 나의 글을 열렬히 응원해 줬다. 가랑비메이커라는 여섯 글자가 내게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을 때, ‘가랑비메이커 작가님께’라는 글자가 또박또박 적혀 있는 편지봉투가 도착했던 적이 있다. 순례길을 걷던 S에게서 도착한 편지였다. 편지에 적혀 있던 모든 말들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제라도 나의 다음 글을 기다리겠다는 문장만큼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책은 지나칠 만큼 숭고한 것이었고 그 탓에 스스로 낸 책에 자부심보다 부끄러움을 느꼈다. 작가라는 이름, 책이라는 세계에 대한 열망이 커져 갈수록 ‘다음 책’은 저 멀리에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몇 계절을 사이에 두고 두 번째 책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에는 그 무렵 S의 시선이 컸다. 어설프게 참여했던 마켓과 토크에 찾아와 한 아름 꽃을 안겨주고 아무도 나에 대해 묻지 않았을 때 가장 먼저 나를 인터뷰했던 것도 S였다. 오랜 시간 운영해온 블로그에 인터뷰를 싣고 싶다며 정성스럽게 준비해 온 질문과 붉게 상기된 S의 얼굴은, 그날에 함께였던 창경궁을 지날 때마다 어렴풋하게 떠오르곤 한다.
동갑내기인 S와 말을 놓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래전부터 좋은 친구가 될 거라는 예감이 있었지만, 작가와 독자라는 관계를 놓고 싶지 않은 욕심도 있었다. 글이 아닌 삶으로 맨살의 우정을 나누게 된 독자는 S가 처음이었으니까. 고맙게도 S는 독자의 이름을 내려놓지 않고 친구라는 이름을 하나 덧입어줬다. ‘잘 읽을게요.’에서 ‘잘 읽을게’로. 달라진 건 그녀의 말에서 ‘-요.’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여전히 나의 글을 성실히 읽어주었고 잊지 않고 나의 기념들을 축하해 주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땠냐고 묻는다면, 미안하고 부끄러워 이 글 뒤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작가로도 친구로도 성실하지 못했다. S의 시선이 전부이던 초보 작가 시절을 지나, 어느덧 8년 차 작가가 되었고 작은 출판사도 운영하게 되었다. 그간 세상에 내놓은 책들이 늘었고 고맙게도 나의 다음을 기다리는 독자들도 늘었다. 그러는 사이 S의 응원과 안부에 긴 답신을 남기던 나는 어느새 친구라는 이유로 소극적인 화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꿈 많던 이십 대 중반의 우리는 서른이 됐다. 여느 관계가 그러하듯 일이 바빠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체력이 따라주지 못해서- S를 만나는 주기는 계속 늘어져 갔다. 이따금 찍힌 부재중에 전화를 걸면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가 흘러나와 통화를 미뤄야 할 때도 많았다. 그만큼 우리는 치열한 서른을 지나가는 중이었다.
목포에서 지내던 삶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온 S와 오랜만에 만나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마치 어제 본 사이처럼 우스운 말을 나누는 일이었다. 눅눅한 장마에 마치 어항 속 같던 종로 거리를 우산 없이 함께 걸었다. 창경궁을 거닐며 인터뷰 사진을 찍던 때처럼 가는 비가 내렸다. ‘작가님’, ‘S님’ 하며 서로를 조심스럽게 대하던 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그때처럼 S는 나를 깊이 읽어주는 사람이다.
LP 음악이 흘러나오는, 헛간처럼 작고 아늑한 카페에 나란히 앉아서 따듯한 홍차를 홀짝이며 우리는 습관처럼 첫 만남을 떠올리고, 그때와는 사뭇 달라진 서로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줍던 첫인상과 달리, S는 좋아하는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계절마다 크고 작은 모험을 했다. 늘 새로운 사람들과 재밌는 일들을 꾸미는 그녀에게 어쩜 그렇게 지치도 않고 마음을 다하는지 물었다. 그녀의 답은 의외였다.
“나, 모두에게 마음을 주지는 않아. 그런데 너한테는 아무 계산도 하지 않고 주었던 것 같아.”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 계산하지 않고 주는 마음이라니. 계산하지는 않았지만 늘 주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끝났던 지난날을 돌아봤다. S가 있던 목포에 가려다 만 겨울과 좋아하는 책과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내려놓은 전화기, 수고했다고 축하한다고 조금 더 힘주어 말할 수 있었던 순간들은 아무도 모르게 지나가버렸다. 언제나 큰 배낭을 메고 나타나, 산타처럼 선물을 쥐여주고는 사라지던 S에게 나는 늘 어린아이처럼 받기만 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어린아이가 아닌 다정하고 든든한 그녀의 친구가 되고 싶다. 좋은 글이 곧 보답이던 시절은 지났다. S가 보내오는 여전한 다정한 시선에 응답할 수 있는 수많은 방법을 알고 있다. 알고 있는 것, 마음먹는 것에서 더 나아가는 것이 이 여름의 숙제다.
“내가 지금까지 봐온 S, 너는 서울에서도 잘 할 거야. 그게 무엇이든. 네가 지금까지 지나쳐온 사람들, 해낸 일들이 자산이니까.”
가장 먼저, 속으로만 가졌던 응원의 말을 전한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부터 시작한다. 그녀가 건네준 응원들이 아무도 모르던 무명의 내가 지금, 여기까지 쓸 수 있는 힘이 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시작을 앞둔 S에게 어설프지만 성실하게 사랑의 응원을 전하고 싶다.
‘S, 무엇이든 잘 해낼 거야. 네가 흩뿌려둔 크고 작은 모험의 씨앗이 단단하게 심어져 있으니까.’ 다음에는 목소리를 내어 전해줄 것이다.
4월의 제주에서, 숙현 (@sallyyoon)
19'-23', 목포 채식 식당 <최소한끼>
22'-23', <시네마클럽> 수다와 디저트를 담당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계절 에세이 <한 뼘의 계절에서 배운 것>
"책을 빼앗긴 S도 무언가에 열중하던 Y도 소리 없이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순간, 우리가 이 순간을 그리워하게 될 거라고 직감했다." (수록글 '바다 수영, 한 가운데')
돌이켜보면 내게 작가라는 이름을 가장 먼저 불러준 것도. 나에게 처음으로 바다 수영을 가르쳐 준 것도 숙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연재의 첫 화를 숙현에게 선물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