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동료, P의 당부의 말
어릴 적부터 시를 좋아했기 때문일까. 이따금 상대의 언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타인에게 무심한 편이고 사소한 이야기에 크게 마음을 두지 않는 무던한 성격이지만, 마음이 가는 사람 앞에서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그의 언어를, 그의 제스처를 나노 단위로 해체하고 분석해 알고 싶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나눈 말들을 몇 번이나 복기하며 그 너머의 의미를 제멋대로 음미하고 싶은 이상한 고집은 종종 오해와 때 이른 상처를 겪게 했다.
“해석하지 말고 그대로 믿어 봐.
생각보다 사람도 사랑도 단순해.
그 사람의 말, 행동을 오래 들여다보는 게
정확하게 보는 방법은 아닐 수도 있어.
때로는 있는 그대로 보고 보이는 그대로
믿는 것이 필요해.”
사랑 앞에서 천진한 아이가 되기보다도 탐정 노릇을 하려고 드는 나를 아는 P가 말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 발을 빼고 마는 이유는 지나치게 복잡하고 신중한 탓인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생각했다.
‘아무 의심과 해석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일이라. 복잡한 세상에서 그렇게 마음 놓고 마음을 주어도 되는 걸까. 투명하게 눈에 보이는 사랑이 나 같은 사람에게도 찾아와 줄까.’ 세상에, 나는 또 습관처럼 P의 말마저 곱씹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나에게 P는 한층 더 온유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글을 쓰고 사는 사람들이라서 그래.
문장 한 줄을 쓰는데도 열심히 썼다가 지웠다가
하면서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사람을 읽을 때도 습관처럼 이면의 의미를 좇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나를 대신하여 P가 내놓은 이유는 이랬다. 좀처럼 사람과 사랑을 믿지 못하는 ‘나의 문제’를 ’ 우리의 것‘으로 가져왔다. 자책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그만큼 P는 나를 잘 아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 그래, 그녀의 말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p는 내가 처음으로 사귄 동료 작가였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첫 책을 내고 그로부터 2년이 지난 봄이었다. 연남동의 작은 책방에 입고를 하던 중에 그녀를 만났다. 기다란 원목 테이블에 앉아서 책에 사인을 하던 중에 불쑥 귀여운 응원이 들려왔다.
“그 책, 잘 팔릴 거예요!”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발갛게 익은 낯선 얼굴을 한 작은 체구의 P가 서있었다. 엉뚱하고도 다정한 응원의 말, 그것이 우리가 처음 나눈 말이었다
“저, 작가님 팬이에요.
저도 한 권 사인해 주세요.”
어쩐지 처음 보는 그녀가 낯설지 않다고 느꼈는데 알고 보니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오며 가며 알고 있던 사이였다. 수줍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서로의 책에 사인을 해 전했다. 그날 우연한 만남을 시작으로 P와는 금세 가까워졌고 그녀는 종종 나의 일기에 등장하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P를 만나기 전까지 내게는 이따금 안부를 묻는 동료조차 없었다. 첫 책을 내던 무렵, 긴 시간 독자들의 사랑과 동경을 받아온 작가들의 문제적 삶이 폭로되었고 연일 뉴스와 인터넷이 시끄러웠다. 이름을 걸고 써왔던 글과는 전혀 달랐던 그들의 삶에 상처받은 독자들 가운데는 나도 있었다. 얼마간 상실감에 글을 쓰지 못했고 책장에 꽂혀 있던 몇 권의 책을 처분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글을 쓰며 사는 동안은 근신하듯 살아가겠다고. 그리하여 책을 매개로 한 자리에서는 얼마간 소극적인 사람처럼 지냈다. 동료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늘 가벼운 목례를 했을 뿐이고 독자가 있는 곳에서는 지나치게 긴장하면서 말을 아꼈다. (이제와 생각해 보면 근신한다는 말을 오해했던 것 같다.) 그렇게 근신 아닌 고립에 가까운 시기를 지나던 무렵에 P를 만났다.
나에게는 없는 섬세하고 신중한 면을 지닌 동시에 한없이 다정한 P로부터 많은 걸 배웠다. 둥글게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 문제 앞에서 때로는 우회하며 더 나은 방법을 찾는 것 모두 이전에는 조금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따금 따듯한 집밥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P에게는 오래 닫혀 있던 마음이 열렸다.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내가 사랑에 대한 고민과 관점을 터놓을 수 있던 것도 그녀였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나보다도 더 심각한 얼굴로 함께 고민해 주는 P의 말을 나는 신뢰할 수 있었다.
*
대화를 마치고 헤어질 때 그녀는 다시 한번 내게 힘주어 말했다. 너무 오래 생각해보지 않아도 될 만큼 이미 너는 있는 그대로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다고, 그녀의 팔자눈썹이 선명해지는 만큼 사람과 사랑을 순전하게 바라보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그날 이후로 P의 말처럼 사랑 앞에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고 순전한 마음이 되기 위해 애썼다. 사랑을 말하는 얼굴 뒤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글을 쓰고 읽는 것과 달리, 사랑을 읽기 위해서는 치밀한 계산이 필요 없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말 P의 말처럼 내게도 사랑이 시작됐다. 굳은 팔짱을 풀고 활짝 안아주고 싶은 사랑, 다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밀도 높은 사랑, 저 멀리 어딘가에 있을 의미를 좇지 않아도 충분한 코 앞의 사랑. 그 사랑을 알아보고 그를 향해 달려갈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에는 P가 내게 건네준 “해석하지 마!”라는 말의 덕도 있다.
P에게, “더는 해석하지 않아. 다만, 투명하게 웃고 울며 사랑을 이야기하고 듣는 중이야. 덕분에. 고마워. 이제는 P에게도 순전하고 아름다운 투명한 사랑이 시작되기를 기도할게.”
다정한 나의 첫 동료, 수진 (@iam.__________)
16‘ 나 너 그리고 우리
18’ 지금 여기 그리고 오늘
23‘ 대체로 동그라미
23’ 독립출판사 시옷과 리을 사이
해석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듣고 맡고 만지는 사랑.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도 투명한 사랑을 발견하기를 바라요. 제가 발견했으니, 모두가 발견할 수 있을 거예요.
*P와 함께 나눠가진 첫 책은 <지금, 여기를 놓친 채 그때, 거기를 말한들>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