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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Sep 16. 2023

R의 말 "글을 쓰면서 어쩜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쓰는 일의 책임과 위선에 대하여 

     듣는 말에 민감할수록 뱉는 말에도 민감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입은 하나라서 서둘러 뱉기에 급급하고 귀는 두 개라서 더 크게 듣고 반응하게 된다고 변명을 하고 싶은데, 이럴 때면 내가 가진 쓰는 직업이 마음에 걸린다. 글을 쓰며 사는 일이 나만의 소망이 아닌 공공연한 직업이 되었을 때 주변에서는 인지부조화가 일어났다. 어릴 적에 함께 뛰놀며 이따금 험한 말도 주고받았던 친구가, 동생이, 누나가 작가가 되었다는 사실은 스위치를 누르듯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었을 거다. 종종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라는 말로 시작되는 농담을 받곤 했다. 실없는 농담을 할 때나 맞춤법을 틀렸을 때, 아무 이유 없이 나를 골탕 먹이고 싶어 할 때, 친구들은 마법의 문장이라도 되는 듯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했고 나는 말없이 웃음을 터뜨리거나 "그럴 수밖에!"라며 가볍게 멱살을 잡곤 했다. 

    

     "글을 쓰는 사람이, 글로 사람을 위로하겠다면서 나에게는 어떻게 그런 말로 상처를 줄 수 있어? 지금 네가 얼마나 위선적인지 알아?"


     글을 쓰는 사람이 어쩜, 이라는 말 앞에서 더는 웃지 못하고 뒷목이 빳빳하게 굳고 마는 일이 생겼다. 지금으로부터 수년 전의 일이다. 유치한 장난을 주고받다가 무심코 던진 말이 오랜 친구 R의 마음을 할퀸 것이다. 저글링을 하듯 짓궂은 말들을 주고받으며 함께 자란 친구였기에 갑작스러운 R의 반응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농담은 함께 주고받았는데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갈등의 몫이 내게로 기운 것 같아서 억울한 마음도 있었다. 그보다, 글을 쓰며 사람을 위로하겠다던 어린 날의 결심을 위선이라 말하는 R이 가혹했다. 쓰기로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부침과 결핍과 싸워야 했는지 (당시에는) R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더 나이를 먹고 나니 나를 아는 것은 결국 겨우 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R의 마음을, 그녀는 나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R의 말을 묵상하듯 곱씹는 바람에 꽤 긴 시간 그녀와의 관계는 얼어붙어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기억하건대 그녀가 내게 위선적이라는 단어는 잘못된 표현이었다며 진심 어린 사과를 전했고 그덕에 우리는 다시 아주 가까운 친구 사이로 돌아오게 됐다. 그러나 이전처럼 막역할 수는 없었다. 나의 장난기 그대로였지만 말을 할 때면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했다. 그건 R의 앞에서만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R의 말이 센서티브한 그녀만의 생각일 거라 여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쓰는 사람의 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출간기념회에서 뒤풀이 자리 혹은 강연에서 듣는 그들의 말은 책 속의 글과는 다른 힘이 있었다. 그들이 쓴 글에 색을 더 짙게 하는 힘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들이 쌓아온 책들을 (나에게만큼은) 와르르 무너지게 하는 힘도 있었다. 글을 쓰는 사람인 동시에 읽는 사람으로서, 말을 하는 사람인 동시에 듣는 사람으로서 나도 종종 '글을 쓰는 사람이 어쩜 말을 그렇게......'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고심하며 적어내는 문장과 습관처럼 툭 뱉어지는 말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만남을 줄이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그날 내가 뱉었던 말들을 복기하기도 했다. 후회와 안도를 오가며 최악의 말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종종 얼굴을 붉히게 되는 말실수를 한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버스 창문을 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냐, 그 말은 하지 않았어야지!' 하고 싶은,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은 채 사라지고 싶은 순간들은 드물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제는 스스로 묻는다. 글을 쓰는 사람이 어쩜 말을 그렇게 할 수 있냐고. 그럴 때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꾹 닫는다. 스스로가 만든 잠깐의 묵언의 감옥 속에서 말보다 더 나를 정확히 전할 수 있는 문장을 고른다. 어쩌면 내게 글쓰기란 이따금 변명과 자숙의 결실인지도 모르겠다. 


     모쪼록 남은 계절은 조금 더 적게 말하고 더 깊이 쓰는 삶을 살고 싶다. 여전히 쓰는 자리는 내게 송곳의자같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푹 퍼져서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긴장감 있는 이 자리를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의 나는 오늘의 몫을 다 하고 싶다. 지난 실수들을 수습하고 만회하는 기회로 여기며.





연재인의 한마디

글을 쓰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삶. 이 부끄러움과 반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도 부끄러운 고백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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