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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Oct 27. 2023

K의 말, "당신의 치열함이 제게 힘을 전해줘요."

오래된 나의 독자 K로부터, 도착한 어느 겨울의 편지.

      ‘작가님을 봐온 지 어느새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네요. 그 시간 중에 아마 올해가 가장 바쁘셨지 않았을까 싶어요. 출판사 대표로서 작가로서 열심히 달려오시느라 이 1년이 어찌 갔는지도 모르셨을 것 같네요. … 앞으로 제 삶의 시간들도 작가님의 글과 함께 해 간다면 잘 견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의 치열한 하루하루가 이렇게 한 사람에게 큰 힘을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꼭 드리고 싶어요.’


      주말 오후 에세이 특강을 마치고 받았던 편지를 저녁이 다 돼서야 펼쳐보았다.


      활기차게 수업을 이끌고 난 후에는 늘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수업이 끝난 후 습관처럼 숨을 곳을 찾았다. 천장이 높고 조명이 거의 없는 카페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잊고 있던 하얀 종이백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정성스럽게도 꽁꽁 싸여있는 빵 한 덩이와 손바닥만 한 편지 봉투가 들어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12월 한 달간 얇게 잘라 음미하며 먹는 슈톨렌, 잘못 접힌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편지지 두 장, 또박또박 적어둔 글자들. 거기에 여러 계절 우직한 마음으로 나를 응원해 주는 K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K는 이따금 열리는 수업과 마켓에 찾아와 달콤한 디저트와 함께 깨알 같은 손글씨로 쓴 편지를 건네주는 이다. 나의 오래된 문장을 열렬히 읽어주고 때때로 글쓰기 모임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글로 조금씩 꺼내 보이기도 하는 그는 늘 적당한 거리에서 한결같은 마음을 내비치는 독자다. 내게 그러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깊은 위로가 되는가.

     바닥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고요 속에서 나를 향한 응원의 말들을 펼쳐 읽는 일, 편지 위로 눈물을 떨구며 눈물 젖은 디저트를 베어 먹는 일은, 겨울에도 땀을 내며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무명의 작가에게는 고마운 바람이다. 오랜 더위를 식히고 잠시 권태로웠던 정신이 번뜩 들게 해주는.


     ‘앞으로 제 삶의 시간들도 작가님의 글과 함께 해 간다면 잘 견뎌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님의 치열한 하루하루가 이렇게 한 사람에게 큰 힘을 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꼭 드리고 싶어요.’


     나의 치열한 하루하루가 큰 힘이 됐다는 문장을 반복해서 읽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받쳐주고 있는 이들이 실재하다는 것을 비소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기름진 얼굴로 모니터를 노려보던 오전과 파스를 두른 손목으로 열심히 박스를 옮기는 오후. 여전히 익숙하지 않은 거절에 의기소침해졌던 저녁과 일인다역에 완전히 녹초가 되어 쓰러지는 새벽을 반복했다. 끝을 알 수 없는 고요와 불확실함이 방망이질하는 삶은 유일한 자랑이던 열정마저 가루를 내기도 했다. 작은 바람에도 저항도 없이 흩어지지 않을까 두려워질 때, 그때마다 거짓말처럼 내 손에는 작은 편지와 디저트가 들려져 있다.

     돌아보면 비틀거릴지언정 아주 넘어지지는 않았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길을 시원하게 달려본 적은 없지만 더듬더듬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한 응원을 전하고 있는 이들의 은근한 시선 덕분임을 안다. 치열하게 살아내며 남긴 고작 몇 줄의 문장이 누군가의 삶의 원동력이 된다면 나는 더 이상 이 삶을 두고 효율이 적은 삶이라며 불평할 수 없다. 더 적은 시간과 노동으로 더 많은 이익을 얻어야 똑똑하게 사는 것이라 말하는 세상에서 나는 어디쯤에 있는 걸까, 다시금 불안해질 때도 있겠으나 괜한 용기가 움튼다. 나 하나쯤은 긴 시간을 느리게 여행하듯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이 여행이 때로는 낭만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유랑에 불과하다고 하여도 괜찮다. 이따금 맛보는 달고 짠맛의 위로를 그 누구보다도 제대로 음미할 수 있으니까.


     어둑한 카페 구석에 앉아서 그렁그렁한 눈으로 편지를 읽다가 머쓱해져 화장실로 가 아무 이유도 없이 손을 깨끗이 씻었다. 뜨거운 머그잔을 움켜쥐며 푹 퍼졌던 손 끝이 다시 예민해진다. 어제와 다른 마음으로 작업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무엇이든 쓰고 싶고 쓸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몸살 든 몸에 약기운이 퍼지듯 번진다. 모든 게 끝나가는 것만 같은 한 해의 끝자락에 와있지만 매일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다는 것, 언제든지 새로운 문장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한다.


     삶은 멈춰 있는 사진이 아니라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영화에 가깝지만 그 사이사이에 자리한 잊지 못할 순간들은 마치 멈춰 있는 한 장의 사진처럼 변함없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짧은 장면들이 우리의 길고 지난한 삶을 붙들고 있는 건 아닐까.

     12월의 어느 토요일, 음악 하나 흐르지 않는 고요한 카페에 앉아서 펼쳐본 편지 속 글씨들의 리듬과 투박하게 잘린 슈톨렌 조각 하나. 이 간결해 보이는 장면 하나가 나의 한 시절을 안전하고 다정한 곳으로 이끌어 줄 거라고 믿는다.



2021년 12월, 두 번째 커피를 마시며.

연재인의 한마디

갑작스럽게 바람이 차가워졌어요. 가을과 겨울을 누구보다 기다렸지만 바람이 차가워질수록 한 해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어요. 그 탓에 괜히 조급해지고는 하는데요. 그럴 때는 긴 호흡의 글을 쓰는 일이 더 수월하지 않네요. 쓰기보다는 읽는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 마주한 2021년에 집필했던 마지막 원고를 새롭게 고쳐 썼습니다. 지난겨울의 마음을 다듬으며 다가올 겨울을 온 마음으로 마중 나가려고 합니다.


신간 출간 소식

도서 <오늘은 에세이를 쓰겠습니다>는 에세이를 처음 시작하는 분들을 위한 노하우 글쓰기 실용서입니다. 슬기로운 쓰기 생활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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