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천원짜리 씨앗이 남긴, 증명

그것 봐, 내가 된다고 했잖아.

by 가랑비메이커

지극히 가랑비적인 스물 한 번째 이야기

<고작 천원짜리 씨앗이 남긴, 증명>




이런 순간에 나는 울컥한다.
거, 되겠어? 하는 시선들 사이로
비집고 태어나는 그 모든 순간들.
내 마음을 모두 줘버리고 싶을.

'거 봐, 내가 된다고 했잖아.'




│작은 씨앗에 담긴 건



봄이 오기 전에 작은 씨앗을 심는 일은 괜한 일이 되어버린 요즘. 잘 자라나던 잎들도 시들시들 말라가는 늦겨울, 여전히 추위가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한 가운데 작은 씨앗을 심은 일은 성급해 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작은 생명을 품은 그것에게 조금은 가혹하지 않나 싶을 수도 있겠지.






그럼에도 나는 씨앗을 심었다. 이미 울창해진 방 한 켠이었는데 건네 받던 그 순간부터 단단하고 푸르던 잎사귀들에게서 느껴지는 에너지가 내게 활력을 주기도 했지만 어쩐지 날 적부터 푸르렀을 것만 같은 단단한 녀석들에게서 묘한 질투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어릴 적에도 관심 없던 씨앗 심기를 했다. 처음 내가 심었던 건 작은 블루베리 씨앗. 자라나기 힘든 녀석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음에도 이왕이면, 하는 마음으로 데려왔던 작은 씨앗은 끝내 아무것도 품지 못했다. 몇 번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했고 볕에 두었다가 다시 그늘로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분투했지만 감감 소식이 없던 블루베리 씨앗.



거 봐, 원래 이미 자라난 거 말고는 네가

새로 키우긴 힘들어.


─그럼, 걔네들은 씨앗에서 나온 게 아니야? 나도 할 수 있어.





그래서 다시 찾은 건 바질 씨앗이었다. 화려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 같던 블루베리가 주던 설레임은 없었고 그저 해보자, 하는 오기로 찾았던 흔하디 흔한 바질 씨앗에게서 매일 아침의 시선을 내어주게 될 줄은 몰랐다. 쑥쑥 커나가는 녀석들 사이로 조그맣게 고갤 내밀던 바질 싹이 내게 어떤 증명을 해보이는 것만 같았다.



거 봐, 나도 할 수 있다니까.
나도 잘 자라날 수 있어.



할 수 없다고 하는 것들에게서 쉽게 고개를 떨구지 못하고 더 높이 처들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나였다.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은 곳에 둘러쌓여 있는 내게 탐스러운 블루베리 열매는 당장에는 어떤 신기루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척박한 곳에 놓여 있는 내가 한 아름 열매를 가지고 그들 앞에 내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통쾌할지, 그것만이 내게 온 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 블루베리가 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던 날, 나는 종일 블루베리 열매를 주워다니는 꿈을 꿨다./



아직은 찾을 수 없는 신기루에게서 눈을 돌렸지만 그럼에도 땅만 보지 않고 작은 빗물이라도 받아보자, 했던 내가 키워낸 작은 바질 싹은 내 스스로에게 하는 증명과도 같았다. 고작 천원짜리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일지라도 그랬다. 그건 증명이었다.





│내가 품고 있는 것이 맺을 때



재작년 가을, 책을 내고 벌써 2년이라는 사이 5, 아니 봄이 오면 6번의 계절이 변하는데 그 사이 나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펼쳐보일 페이지가 없었다. 페이지가 없다는 건 증명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책을 낸 다음 달인 2015년 11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꼬박 13개월 간 그리며 기록해온 페이지들은 한 권의 책으로 엮이기 전까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단상집을 찾고 있고 새로운 작업물을 기다려주고 있었지만, 예정되었던 새로운 출간에 차질이 생겨버리면서 나는 내 안에 가지고 있던 씨앗이 키워낼 싹이 싹뚝, 잘라져버린 것만 같았다.


흘러가는 날들이 쌓여갈수록 내게 다가오는 건 페이지를 통해 만나게 될 나의 새 이야기들이 아닌, 저멀리 등을 돌리고 사라져가는 이름 모를 존재들이었다. /늦은 작업으로 늦은 아침까지 잠을 헤치지 못하던 날이면 어김없이 꿈을 꿨다./


아무도 내게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달라진 건 나 하나로 충분했다.



그 사이 나는 무언가를 통해서라도 증명하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내 안에 자리잡고 있던 작은 욕구가 일었는지도 모른다. 고작 천원짜리 바질 씨앗에게서 자라난 작은 싹을 보며 증명이니 뭐니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한낮, 퉁퉁 부어버린 못난 내 얼굴이 조금은 귀엽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기억되는 건 그에게서 나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열매가 아니라 작은 싹이면 어떤가. 날 때부터 어른이던 사람은 없고 처음부터 열매이던 식물은 없다. 그저 모두가 씨앗을 헤치고 나오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막 시작하고 있는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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