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가 아니라 여전히

뒤돌아 볼 겨를도 없이, 묵묵히 걸어온 우리의 지금.

by 가랑비메이커

지극히 가랑비적인 스물 세 번째 이야기

<아직도, 가 아니라 여전히, 라구요.>





벌겋게 번진 눈가에서 결국,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만 것은- 예고도 없이 비가 쏟아지던 초저녁. 내가 좋아하는 종로 어느 한 구석에서, 투닥거렸어도 늘 서로의 앞날을 응원하던 이를 마주한 밥상에서.





그래서, 아직도 계속 글을 쓰는 거야?
책을 내고 또 내면서?




네, 그렇죠. 근데 아주 글만 쓰고 있진 않아요.

그리고 저도 내년쯤에는 정말 졸업을 하고선

직장에 들어가야죠. 이전부터 그럴 계획이었고..

글을 언제나 쓸 거예요.

언젠간 정말 전업이었으면 싶지만 지금은......



아니, 근데 다들 나한테 왜 그러지?

나 아직도, 아니라니까.

그냥 계속 글은 평생 할거라니까.

나도 마냥 뒹굴면서 한줄 한줄 채우는거

아니라고요. 정말

/




엉뚱한 얼굴을 앞에 두고 나는 얼얼해진 고개를 빳빳히 세웠고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원치 않은 이야기들이 하나둘 쌓이기 시작하면 무게와는 관계 없이 늘, 마지막에 하나 더 얹어 놓은 사람에게 모든 화살이 쏟아지고 만다. 마치, 어릴 적 즐겨하던 보드게임처럼. 공평하게 돌아가며 하나둘 긴 막대를 빼놓으며 위태로워질대로 위태로워진 상황을 건네 받은 마지막 주자에게 와르르 무너져버리는 탑처럼.




꽤나 오래 연락이 끊겼던 그가, 두 번째 책을 냈다는 소식을 전하던 내게 하고 싶었던 건 어떤 충고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동료에게서 어떠한 확신을 얻고 싶어서 무심코 뗀 첫 마디였을지도 모른다.







한때는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과 함께 취업이 아닌 창업, 창직을 품고 달려왔던 그가 이제는 다시 혼자가 되어 '내 사업, 내 가방'을 위해 선잠을 자며 새벽에는 아르바이트를, 오후에는 조금 더 늦은 출발을 한 이들을 위한 컨설팅을 한다 했다. 그래서 정작 필요한 디자인과 생산에 쏟는 시간들이 빠듯해졌다고. 그럼에도 결코 원하는 일만 할 수 없는 지금을 모르지 않기에 어쩔 수 없는 지금, 여기 자신의 젊음이 이렇다고.



나는 그제야 짧았던 의심의 눈길은 거두고 아직도, 가 아닌 여전한 그에게서 안도를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열의와 패기, 가 옅어진 얼굴에게서 작은 서글픔이 느껴졌다. 까무잡잡하고 수염이 난, 나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그 얼굴에게서 내가 보이는 것만 같아서. 이제는 누구도 꿈이라는 것과 연상시켜주지 않는 나이의 우리의 대화가 이어지던 늦은 밤까지,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꿈뻑 거려야 했다.




내가 늘 말했었잖아.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방향이라고.
항상 같은 방향을 향했잖아.



이제는 어리지 않은 나이의 그에게서 흘러나온 이야기라고 해서, 그게 자신을 위한 그럴 듯한 변명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전혀, 조금도. 오히려 그건 어리다고들 하는 나이임에도, 조급해지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던 내게 더 큰 위로로 다가왔다.



그래, 정말로 어쩌면 한 번도 되돌아가본 적이 없는 우리이기에. 다시 발을 옮겨 출발선으로 돌아간 적 없는 우리이기에, 어쩌면 더 앞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가끔 누군가가 던진 한숨에 작아져버린 가슴을 안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가던 우리였음에도, 우리가 뗀 걸음엔 단 한 번의 마이너스도 없었으니까. 언제나 출발선에서 멀어져, 언젠가 닿을 그곳에 가까워지고 있던 걸음이었으니까.







앉아마자 일어서고 싶었던 첫 마디, 그에 터져버린 울음을 그치고 나니 우리의 대화엔 끝이 없었다. 처음 글을 쓰겠노라고 다짐했던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펜을 놓은 적 없던, 나와 같은 국문학과를 나와 패션디자인을 복수전공했고 그로부터 몇 번의 해가 변했어도 여전히 가방을 디자인하는 L. 짧게 자른 단발머리에 빗속을 아무렇지 않게 첨벙거리던 나와 까무잡잡한 얼굴에 덥수룩한 수염과는 안 어울리게 유난히 빗방울을 피하던 L.



조금도 닮아 있지 않은 우리가, 앞에 놓인 커피잔 안 다 녹은 얼음을 앞에 두고서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모습을 보며 다른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앞다투어 말을 이어가다가도 이따금 울컥, 치밀어 오르던 삶의 파도에 침묵하던 우리, 그 울긋불긋해지던 눈가의 온도를 그 누구가 알까.


아직은 우리만이 아는 그 온도일지라도 언젠가는 그게 또 다른 누군가를 녹여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우리는 다시금 희망을 꿈 꿔보기로 했다. 긴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엔 비가 잦아들고 있었고 무겁던 걸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날의 일기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가 아니라
여전히, 제 길을 나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걸.

그리고 그 걸음엔 끝이 없을 거라는 걸.



그언젠가는, 우리가 마침내 쥐어들 것들은 누군가에게 등 떠밀려 얼떨결에 붙잡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고.

그 짊어든 것과는 조금도 같지 않을, 홀가분한 것들일 거라고.

당당히 내뱉는 날이 올거다. 이건 장담하는데, 막연한 낭만으로 뱉는 확신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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