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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랑비메이커 Oct 05. 2017

가을로 순천 여행, 혼자라는 것

생각만큼 근사하지 않으면 어때


2017/10/3 (화) 밤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떠났다. 내게 있어 이 여행이 가지는 의미는 꽤나 큰데, 보통 가을즈음에 작업을 끝냈던 나로서는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온전히 만끽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 책을 냈을 때도, 두 번째 책을 끝내던 때에도 마음 속으로 외쳤던 건 "이것만 마무리 되면 나는 가을 여행을 떠나버릴 거야." 였다.




그게 현실이 되기까지는 꽤 많은 이유들을 없애야만 했다. '이왕 떠나는 거 함께라면 더 즐거울 수도 있어, 나 한 번도 혼자 어딜 떠나본 적이 없는 걸. 괜히 위험한 일을 만드는 건 아닐까? 더 외로워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만큼 근사한 전개 따위는 없을지도 몰라.' 같은 마음의 이유에서부터, 여행을 위해 시간을 비우는 것과 묶을 곳과 이동경로를 찾는 사사로운 것들까지.

하지만 가야겠다고 막상 결심을 하자, 그런 이유들은 떠나야한다는 의지와 기대에 너무도 쉽게 밀려나 버렸다.




밤기차, 고요한 상상들



이른 새벽에 일찍 떠난 적은 있었지만 늦은 밤 기차를 타고 떠나는 것은 처음이었다. (명절 황금연휴 기간 내 겨우 구해낸 차편은) 익일 이른 새벽 도착이 예정이라, 계획했던 여행보다도 반하루 정도가 더 일찍 시작된 것 같아, 조금은 들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늦은 시작은 준비를 더디게 만들고, 나는 결국 기차 출발을 겨우 2분 앞두고 자리에 안착할 수 있었다. 내가 탄 기차는 가장 느리다는 무궁화였다. 남아 있는 티켓이 그뿐이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렇지 않았더라도 나는 같은 출발을 선택했을 거다.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은 여행. 그저 가을에 떠나면 됐고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가을의 고향으로 기억해온 순천으로 향하는 열차였으니까.


밤기차, 창가자리에 앉으며 상상했던 것은 캄캄한 열차 밖으로 보이는 작은 불빛들, 사색에 잠기기 좋은 고요함이었다. 그러나 내 상상은 조금 다르게 흘러갔는데, 늦은 시각부터 이른 시간까지 달리는 기차였음에도 처음과 끝까지 환한 불을 끄지 않는 거였다.


때문에 창을 통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밖이 아니라 안이었다. 분주하게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 통로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연인들, 빈좌석을 찾아 옮겨다니는 입석여객들.



창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과 이어폰 너머로 흐르는 음악에 집중하는 일은 내가 마음껏 고요한 상상을 하도록 해줬다. 그들이 도착할 곳과 떠나는 이유, 그곳에서 기대하는 얼굴들과 장면들은 무엇일까.


이들 중에 혹시 누군가는 나처럼 떠나는 길과 돌아오는 길, 그리고 그 사이 모든 시간을 오롯이 혼자 보내기 위해 떠나고 있지는 않을까.




낯선 시작, 조금 느리게



기차는 여수EXPO행이었지만 몇 번이고 감았던 눈을 떠, 기차가 잠시 머무르다 재출발하던 역을 확인하던 내게 종착이 된 곳은 순천. 새벽 3:33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내리고 역에 나와서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이들과 반가움을 나누고 있던 그 사이에 멈춰서 필름사진을 꺼내든 시각은.



순천의 첫 모습은 이른 새벽, 차가운 가을 공기였다. 푸른 새벽 색 사이로 깜빡거리던 빨간 등 같은 거였다.


체크인 전까지 잠시 머무를 곳이 필요했던 내가 급하게찾아본 곳은 낡은 찜질방이었다. 드르륵드르륵, 캐리어를 끌며 도착한 그곳에서 갈아 입을 속옷과 세면도구만 꺼내고 닫는데에도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평소의 나는 짐을 싸는 것도 푸는 것도 훅훅 해내는 빠른 속도의 사람이었지만 낯선 여행지, 예정된 곳이 아닌 낯설고 낡은 곳에서 알몸을 보이는 것이 어색해서였는지 자꾸만 무얼 빠뜨렸다.



아무도 없는, 이제 막 물이 채워진 탕에 앉아 얕게 남아 있는 소독약 냄새를 맡는 일은 마음을 한결 안정되게 만들어줬다. 가만히 물에 떠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집 앞 목욕탕에 와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목욕을 마치고 나니, 모른 척하고 있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쳐 갔을 컴컴한 수면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그 사이에 매트와 쿠션도 없이 나는 맨바닥에 누워 깊은 잠에 빠졌다.




혼자라는 것



이른 점심 때가 되도록 배가 고픈 것도 잊고서 나는 긴 잠을 잤다. 그치만 서두를 이유는 없었다. 늦었다며 곁에서 보채는 친구도 없었고 목이 빠지도록 나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만나기로 한 연인이 있는 것도.


새벽과는 다르게 가득한 사람들 틈에서 천천히 몸을 씻고 나오면서 혼자라는 것,에 대해 실감했다. 자유롭고 여유롭다는 것의 다른 말처럼 느껴지다가도 조금은 외롭다는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건 이틀 간 묶게 된 호스텔 로비 카페에서였다.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짐을 보관할 수 있다고 해서 캐리어를 맡기고 나서 호스텔 직원 분께 받은 순천 관광지도와 먹거리 지도를 펼쳤다. 혼자 여행을 가겠다는 말에 왜?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혼자서는 그 지역의 대표음식들을 맛보기 힘들 거라는 거였다.


대부분 2인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 1인 메뉴는 한정적이라고 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전화를 걸어 받은 곳 중 전부가 <꼬막게장정식>은 2인부터 가능하다고 했다. 그마저도 추석 당일이라 여는 곳이 많지 않았다.


순천에 와서 먹은 것이라곤 출발 당시 언니가 챙겨준 간식 남은 것이 전부였고 첫 식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배가 많이 고팠다. 그래서 호스텔에서 대여한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밖을 나섰다.




한 시간을 넘게 자전거를 타며 돌고 나서야 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 다행이도 혼자서도 게장정식을 먹을 수 있었다. 평소에도 유명한 곳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늦은 점심이었지만 사람으로 가득했고 혼자 4인 테이블을 차지하고서 밥 두공기를 비워냈다. 밖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이들은 어쩐지 내 테이블만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가장 늦게 들어왔고 가장 빠르게 밖을 나선 내가 그들을 위해 더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최소 인원 테이블이 4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나도 유감이었지만.)




정말 가득, 배를 채우고 나서는 근 3시간을 동천과 그 주변을 돌며 자전거를 탔다. 좋아하는 음악들을 플레이하며 동천이 보여주는 가을의 빛과 풍경에 취해 나도 모르게 몇 줄기 눈물이 흘렀다.


혼자라는 건,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도 이런저런 감상을 주고 받을 수 없는 것. 그 앞에 어색하게 서서 포즈를 취하며 찰칵, 하는 소리를 기다릴 수 없는 것.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눈물 몇 줄기 흘릴 수 있는 것. 바람을 가르며 고래고래 노래 한 소절 따라 불러도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것. 내가 그 순간 바라는 것을 망설임 없이 그냥 하면 되는 것.




이전에 만났던 그가 왜 가을 하면, 순천이라고 했었는지를 이제 알 것 같았다. 푸른 나무와 잔디 사이로 조금씩 넓어지는 노란 빛. 바람 결에 들어보는 나무들이 내는 소리와 고요히 흐르는 하천. 그 사이를 아주 천천히 걷는 이들의 뒷모습. 그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가을이었고, 하나의 시였다.



고요하지만 잠잠하지만, 지극히 황홀한 빛의 계절에 혼자라는 건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떠나는 열차 안, 운명 같은 만남은 없었지만 아름다운 풍경 그 가운데 추억이 될 만한 사진은 몇 장 없겠지만, 그래서 이 가을이 지나고 지금을 떠올려 봤을 때 온전히 믿어야 하는 건 내 기억이 전부일지라도.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중간 중간 기록해왔던 일기를 마저 썼다. 날짜를 적어 놓으면서도 여전히 오늘이 오늘이라니, 싶을 정도로 긴 하루였다. 그 하루 가운데 말을 걸고 답 한 건 내가 유일이었지만 그럼에도 참 마음에 드는 하루.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하는 오늘의 여행. 나는 무얼 기록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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