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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un 19. 2020

초식동물-되기

초식동물-되기


  낡은 사람이고자 한다. 바랜 사람이고자 한다. 땅에 무릎을 꿇고 채소를 뒤적거리며 잡풀을 뽑으며 생각하게 된다. 점점 흙에 가까워지는구나. 점점 대지와 뿌리와 채식과 풀잎의 감각에 가까워지는구나. 사유와 바라봄, 의식과 고정관념 들이 땅의 변화에 맞춰지는구나. 나는 조금씩 나에게서 사라지는구나. 내가 아닌 것이 없었던 때가 있었고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세계에 대한 집착이 희미해지기 시작하는구나. 아니다. 손에 잡힌 책이 점점 멀어지면서 문장을 읽을 수 있듯이. 멀어지면서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그런 사람이고자 한다. 옛 어른들이 곡식을 담았던 질그릇 같이 빛바래고자 한다. 어딘가에 있었거나 살았다 거나 존재했다고 펄럭거리고 싶지 않다. 성가신 잎새 하나라도 곡해할 이유 없는 생이다. 흙에 무릎이 닳고자 한다. 손으로 흙을 만지면 만 리 밖에 나무들의 뿌리가 닿는다. 손을 흙 속에 넣었다 빼면 손이 만 리 밖 초식 동물의 앞발이 된다. 먹을 풀을 고르고 땅을 헤쳐 뿌리를 먹고 배설물을 파묻는 앞발. 흙에 손을 넣으며 무릎으로 땅을 기며 마당 한편을 일굴 때 피었다 떨어지는 석류꽃의 질감처럼 검고 딱딱한 인생의 흔적이 전부이고 싶다. 더 뭘 바라. 더 뭘! 볼 것 보았고 겪을 것 겪었고 살음에 대해 충분히 고뇌했거늘 더 뭘 바라. 시란 것에 소설이란 것에 철학이란 것에 종교나 명상 따위에 대해 더 뭘 바라. 하루 햇살 남루한 생의 흔적 같은 등짝의 열기 같았던 생의 감각 죽을 때 등짝에 붙이는 파스 같기 묻히기라도 할까. 낡은 사람이고자 한다. 더불어 해와 달의 살결이고자 한다. 믿음밖에 살고 내 믿음 바깥에로 살고자 한다. 다르게 말해보자. 풀밭을 살았더니 가을이 왔고 풀밭을 응시했더니 겨울에 닿았다. 풀밭에 발이 닿고 초식동물처럼 발이 닿으면 고대의 짐승들과 어린 풀들 갑각류 들이 발바닥 밑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봄을 넘어 믿음 바깥의 대지까지. 이상과 상상의 세계 너머에 까지 풀들과 어린 초식동물과 풀꽃들과 날개 달린 풀피리 같은 새들이 발밑으로 달려가고 있다. 어린 날들의 미래처럼 신선한 공기도 함께 흘러갔다. 그래, 그런 흐름으로 그렇게 무릎이 땅에 닿아 식물들 가지 밑을 기어 다니면서 어린 풀들을 다루고 흙을 보충하고 습기를 다루고 잎새의 건강과 꽃의 과정을 더듬으면서 마침내 짐승의 걸음을 이해하게 되고 짐승의 후각을 알게 되고 초식동물의 풀보기가 무언지 알게 되며 입을 오물거리며 풀을 씹는 동물의 눈을 얻게 되고 마침내 흙이 흘러가고 흘러간 흙에서 풀들의 이동과 초식동물들의 휘파람을 듣게 되고 이끼를 먹는 동물에서 토란잎을 먹는 몸이 뚱뚱한 동물들의 걸음걸이를 체득하게 되고 마침내 내가 바라는 까마득한 바위 절벽을 걸어 다니는 산양의 몸을 얻어서 땅을 떠나 산으로 산을 떠나 벼랑으로 벼랑에 발을 딛고 살고 죽는 초식동물-되기. 마당이나 담 밖 빈 터를 응시하거나 호미로 일굴 때. 무릎으로 먼저 땅에 인사하고 땅에 몸을 맡길 때. 알게 되었다. 초식동물이 되어가던 아버지와 어머니와 큰어머니와 이웃의 형제와 마을의 노인들을. 점점 그렇게 나도 추상화가 그려놓은 그림 같은 대지에 팔 다리가 짐승의 발을 닮는 것을. 


그림

조안 미첼 : “빈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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