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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31. 2020

호두나무 그늘



   빗물이 차올라 번진 담벽의 물이끼는 장마 끝난 뒷 맹렬한 땡볕에 말라 덕지덕지 일어났다. 담 밖으로 호두나무 그늘이 출렁거리며 드리워져 있고, 그늘 속에는 녹색 파라솔 의자가 놓여 있다. 여름 내내 의자에는 팔순 노인이 앉아 있다. 깊고 고요하게 앉아 있다. 주위의 모든 소란스러움이 노인의 몸으로 빨려드는 것 같다. 나무 그늘의 깊고 고요함이 노인을 더 고요한 몸으로 만든다. 마을을 관통하는 국도변에는 별다른 풍경도, 이야깃거리도, 사건도 없다. 낮의 뜨거운 태양과 한두 마리의 새가 나는 허공만 있다. 파라솔 의자의 노인은 그렇게 여름을 그 자리에 앉아 보내고 있다. 차 타고 지날 때마다 상상한다. 내가 그 자리에 노인이 되어 앉아 있는 상상을 한다. 내가 나직이 숨쉬며 앉아 하루가 천 일 같고,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이 깜깜해지고, 지나가는 새의 노래가 무슨 메시지처럼 들리는, 노인이 된 상상을 한다. 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나를 떠난 사람들만 기억 속에 가득한, 노인이 된 상상을 한다. 다만 호두나무 푸른 가지만이 내 이마 근처로 뻗어 나와 나의 옅은 숨소리를 들어주는 상상. 말라 오그라든 몸피와, 담배 몇 모금 빨다 만 입과 코에서 뿜어지는 시큼한 몸냄새를 맡는 호두나무 그늘. 그렇게 여름 한철이 가고, 가을볕이 드는 담벽엔 파라솔 의자도 보이지 않고, 호두나무에서 벌레 먹은 마른 잎이 떨어진다. 어찌된 일인가.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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