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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Jun 07. 2021

봄 비



  봄 비


  나는 환원주의자다. 일식을  처음 예언한 탈레스를 신봉하였다. 만물의 근원인 . 물로부터 만물이 태어난다는 인식을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물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게  것은 탈레스 덕분이다. 봄비가 내린다. 비에 대한 막연한 감상의 시간을 무수히 가져 보았지만 봄비에 대한 시적 고찰이나 사유의 글쓰기는 해보지 않았다. 봄비는 백색 건반에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피아니스트의 사력을 내게 보여준다. 이번 생에 이것밖에 달리   없는 글쓰기의 사력을 보여준다. 봄비는 겨우내 메마른 대지를, 백지 같은 대지에 문장을 쏟아내는 글쓰기처럼 내린다. 무엇으로부터 글쓰기가 아니기에, 실패를 되풀이하는 글쓰기처럼 봄비는 대지를 적셔도 여전히 봄비는 충분하지 않다. 마치 심중에 하고 싶은 말이 흘러넘치고 넘쳐도  드러낼  없고 전할  없는 것처럼. 실로폰을 두드리는 어린아이의 손처럼 나뭇가지가 새로 돋는다. 하루 종일 비와 나무 사이에 서서 나는 환원주의자의 꿈을 꾼다. 가닿을  없는  사람의 얼굴이 어른거리듯이 나와  사이에 시간이 어른어른한다.


  비가 내리는 때가 아니어도 마음에 늘 비가 내리는 이가 있다. 반대로 비가 내리고 내려도 마음에 황무지를 껴안고 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두 방향을 가진 사람이다. 나는 서정적이면서 추상적인 사람이다. 봄비 앞에서 더 그러하다. 봄비에 젖는 나무 앞에서 더 그러하다. 비에 젖어서 생기를 얻지만 못쓸 감기를 겪는 것처럼, 봄의 기색을 보지만 동시에 짧은 봄의 수명을 산다. 그렇다 봄은 내게 짧은 수명이다. 봄비에 손을 내민다. 딱딱하다. 좁쌀을 쪼는 새의 부리 같다. 손바닥에 실금이 젖는다. 이번 생의 결이 정해진 것이 분명한 손금은 봄비에 더 선명하다. 비극을 생을 살 것이라는 조언은 들은 바 없지만, 나는 고요한 격렬을 살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비에 가난한 몸을 맡기는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삶이다. 하지만 비에 젖으면 백옥의 꽃을 피워내야 하는 운명이기도 하다.


 봄비 내리는 날의 오후의 동백나무. 애지중지 키우던 집을 팔고 떠나버린 빈 집의 동백나무. 포클레인에 찢겨나가기 직전 동백을 집으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포클레인 기사에게 사정을 했다. 나무의 뿌리 깊게 포클레인이 동백나무를 드러내어 한편에 세웠다. 봄비에 젖은 나무의 붉은 꽃숭어리들 혼불이 뜨거웠다. 발등이 뜨거워지는 기쁨이 일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의 트럭에 실어 집 마당에 심었다. 땅 속에 잔 돌멩이가 많았다. 삽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비를 맞는 몸에서 열이 났다. 나무를 심는 기쁨이 더한 열기였다. “나랑 평생 살자” 나무를 심을 때마다 나무들에게 해주는 말이다. 나무를 심을 때 꽃숭어리들은 생기를 잃었다. 하지만 충분히 땅을 깊게 팠고 비가 내리기 때문에 나무는 잘 자랄 것이다. 나무가 포클레인에 찢겨 으스러지는 걸 보는 것은 짐승이 죽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루나 이틀 나무에 온통 신경을 써야 하겠지만 이미 땅은 나무를 충분히 봄비와 함께 받아들였다. 나는 예감한다. 내가 심어준 나무들은 나보다 모두 오래 살 것이다. 봄비와 동백과 나는 흠뻑 젖었다. 그날 밤 나는 혹독한 감기에 걸렸다. 봄비에 흠뻑 젖은 감기는 기침을 동반했다. 이틀간 나무의 붉은 꽃숭어리 같은 기침을 기쁘게 밭았다.


 봄비가 내리고 있다. 봄비는 꽃을 피우고 꽃을 지운다. 봄비의 무게에 떨어진 꽃들은 부패의 시간을 가진다. 나무 밑동에 쌓이거나 빗물에 쓸려간다. 하류 하다 멈춘다. 검게 부패하는 꽃잎의 시간은 봄비 이후의 시간이다. 봄비의 시간은 지평의 시간이다. 모든 높은 것들을 지평으로 살게 한다. 너희가 무엇을 바라든 바라는 바는 지평에 닿은 삶이어야 한다고, 빗물은 속삭인다.


 봄비는 깊이가 무한정이다. 말라비틀어진 겨울나무에게 지층 가장 깊은 곳에서 물을 있게 하는 알림을 준다. 나무는 봄비를 흠뻑 맞고서야 겨울잠에서 깬다. 동면에 깬 짐승처럼 하늘빛에 눈부셔한다. 비가 그치고 나면 어린 짐승의 솜털 같은 싹을 낸다. 비의 전언이 그러했다. 솜털 같은 비를 닮은 어린 잎사귀들. 그러나 봄비는 그 깊이를 다 보여주지 않았다. 봄비에 겨우 잎을 낸 나무들과 어린 풀들이 세상에 드러날 때 봄비는 이미 하류의 하류를 거듭하고 먼 강의 입구에까지 휘어져갔다. 나는 시를 생각한다.


‘이곳’의 비는 내가 맞는 비다. 내가 전신으로 맞는 비다. 일상의 언어는 봄비에 기대야 하겠지만, 시의 언어는 봄비에게 기대면 안 된다. 시의 언어는 봄비를 찬양하고 봄비를 기념해야 한다. 봄비는 기대와 반감의 언어가 아니다. 40억 년의 외계의 물이 지구에 닿았던 그대로의 물의 변형이다. 봄비라는 형식의 물은 나무와 메마른 겨울산과 사람의 등에 봄비의 형식으로 내린다. 그것에 대해 세상은 적잖은 반감을 가지기도 한다. 부족하다, 많이 부족하다. 때론 그래, 충분하다. 그러나 봄비는 언제나 아쉬움이 가득한 미량이다. 가로등에도 봄비가 필요하고 떠돌이 개에게도 때론 봄비가 필요하다. 몰라서 그렇지 세상엔 목이 마른 가파른 길도 많다. 가령 삶이 헛헛해서 자기를 극복해야 할 사람의 시간이란 그렇게 가파른 길과 다름 아니다. 그런 길에는 비가 충분히 내려주어야 한다. 시어 언어는 이럴 때 봄비를 찬양해야 하고, 봄비가 내리는 날을 기록해야 한다. 봄비는 신성이면서 죽음을 반복한 생성이다. 봄비는 새로움 없는 신성한 기도이다. 첫 풀잎의 기도이다. 새로움을 구하지 않고 봄비는 지난해의 풀을 다시 낳는다. 말하지 못한 것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풀로 돋게 한다. 말에 얽매이지 않는 것들은 풀의 언어가 된 봄비이다. 이마에 닿는 봄비.


 ‘이곳’의 봄비는 초록을 금빛으로 바꾼다. 황금빛을 다시 흑갈색으로 바꾼다. 담홍색을 너의 안색으로 바꾼다. 적갈색 물결무늬 주름진 아랫배 모양의 진흙으로 바꾼다. 봄비는 계획이 잘 짜인 약속이다. 비를 머금는 사물들은 그들 양식으로 봄비를 치환한다. 폐가의 돌담에 노란 돌꽃들이 자글자글한 것도 봄비의 치환이다. 거무튀튀한 검버섯이 빼곡한 돌담의 시간도 봄비의 반복된 치환의 언어이다. 그는 돌이 물에 젖어 색이 변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무에 돌 하나, 꽃나무 하나에 돌 하나의 정원을 가꾼다. 변화 생성과 불면의 차이가 없는 정원을 가꾼다. 하지만 봄비 속에서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오로지 봄비와 비에 닿는 사물의 이야기만 해야 한다. 철새들이 비를 맞고 돌아오고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먼 곳의 그가 여기 가득하다. 먼 곳의 그의 발등을 나는 모른다. 그의 발등에 비가 내리는 타격을 나는 모른다. 하지만 먼 곳의 그가 여기 가득하다. 삼월의 바람 속에서 간이 버스 정류장에 피부색이 까무잡잡한 외국인 노동자가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 그가 바라보는 봄비 속에서 나는 그 먼 곳의 비를 본다. 먼 곳의 그가 맞는 봄비의 무게와 속도를 본다. 아직 깨어나지 않은 지하의 돌이 머리를 내밀 때까지 비는 내려야 한다. 먼 곳의 그가 서 있는 땅 속에 돌이 머리를 내밀 때까지 봄비는 내려야 한다. 먼 곳에 내리는 비!


 나는 어떤 방향을 무연히 봄비에서 본다. 비늘을 가진 기억의 속도처럼 벚꽃이 진다. 나와 벚꽃은 비에 무게를 충분히 받아냈다. 먼 곳에 그가 지금 여기에 가득하다. 신화적으로 내가 등 뒤의 빗소리에 고개를 돌리면 그란, 기억에도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 생의 일부와 함께 낙화하는 것에도 봄비는 관여되어 있다. 봄비는 나의 지문을 변형시키고 내 운명의 길라잡이였던 나무들의 지문도 바꾸고 꽃의 수명도 조금 바꿀 것이다. 먼 곳에 그가 서서히 지워지는 진다. 봄비의 장막처럼 먼 곳은 내가 겪어보지 못한 먼 곳이다. 이곳의 봄비가 그곳에 닿을 때까지 꽃나무의 꽃은 비틀린 가지 끝에 도달한다. 황톳길이 번들번들해진다.


 봄비는 내막이 없다. 비의 이야기는 젖는 것이 아니다. 봄비는 스미는 것이어야 한다. 스며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비가 스며드는 시간을 보아야 한다. 봄비를 마신 즉각적 반응이 없으면 존재는 비를 피해야 한다. 나무처럼 기도를 하고 비를 바라는 존재들은 비를 생에 스며들도록 받아들인다.  각각의 존재 내부에는 무대가 있고 장막이 있지만 비가 내릴 땐 존재 내무의 무대는 장막이 쳐져 있다. 그처럼 내막이 없는 이야기가 봄비에 있다. 가슴 한쪽이 쿵쾅거린다. 비가 내리는 탓이다. 직후의 마음은 늘 이렇다. 가령 사막의 바라본 직후의 마음도 이러할 것이다. 쿵쾅거리는 감정. 아침에 눈 떴을 때 일어나는 심장의 쿵쾅거림.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존재의 기쁨에 따르는 박동. 이번 봄비의 내막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비가 그치면 지워지는 내막이다. 비가 내리는 동안 영원성을 획득하는 내막인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 이번 생은 너 만날라고 태어났어, 하지만 줄 것은 몇 줄의 시 밖에 없네. 그렇게 비는 내리는 것이다. 봄비가 말이다.


 비의 단식을 본다. 그리고 기다림이 시작된다. 빈 의자에 단식이 빗속에 있다. 새들이 굶고 벌들도 굶는다. 회귀하는 물고기들은 더더욱 허기가 강하다. 그러나 회귀의 시간을 살아야 물고기들은 앙상한 역류의 몸을 거부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봄비는 회귀의 봄비를 내게 퍼붓는다. 내 전생의 사막으로 나를 시간 여행하는 봄비다. 그러면 나는 곧장 붉은 사막의 바람 앞에 서 있는 나를 본다. 얼마나 광활한 사막인가. 그 사막에 비가 흠뻑 젖을 때까지 나는 무연히 서 있다. 단 한마디 말도 바람의 전언도 굴러가는 돌도 깍깍대는 새소리도 없다. 역류하는 시간에서 깨어나고 나면 나는 돼낸다. 이번 생은 새 쓸라고 태어났어. 파슬파슬한 언어로 말이야. 그러면 나를 읽어주는 이가 먼 곳에서 파슬파슬 내 언어의 부스러기를 조합할 거야. 그게 전부야. 이번 생은 이렇게 살라도 태어났어.


 기차를 적시는 봄비. 파슬파슬한 마음의 안쪽 너 만날라고 태어났어. 간이역을 적시는 봄비. 꽃 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을 적시는 봄비. 질감을 입고 색채를 벗는 녹슨 대문의 봄비. 공과금 체납 독촉장이 꽂힌 우편함에 봄비. 너를 만나러 가야지. 봄비가 멈춘 기차를 타고 가야지. 출렁거리는 기차 속에서 녹물을 흘리는 내가 창가에 있는 걸 너는 알까. 너의 종착지에 내가 녹슨 얼굴을 창에 비추었다는 걸 너는 알까. 단식으로 달려간 기차는 다시 비에 젖고 나를 기다린다. 내가 돌아갈 길은 기차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기차에 몸을 맡기지 않는다. 마음이 결이 모든 결과를 알아챘다. 기차는 다시 나를 너의 종점에 데려다줄 수 없다는 걸. 마음에 결이 빗속에서 해체되었다. 갈피 없다. 봄비가 그치면 나는 술패랭이꽃으로 너를 만날 것이다. 술패랭이에겐 취가 없으나 나는 첫 잔의 독주로 간이역을 찾을 것이다.


 낮게, 조용하게, 하류로, 상승이 아니라 하강. 활강이 아니라 하강. 치솟음이 아니라 가라앉음. 돌의 무게가 아니라 물의 무게. 물방울의 무게로, 깃털 같은 삶이 아니라 낙화하는 삶. 낙화 이후의 과실의 삶이 아니라 과실 이후의 가을색의 삶. 그런 방향이 있다. 삶의 주기 안에 그런 방향과 공간과 시간이 주어진다. 그런 때가 오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낸다. 누구나 다 살아낸다. 그러나 딱 그만큼이다. 봄비가 꽃의 무게만큼이듯, 비의 타격은 꽃잎의 열흘 수명만큼이다. 구름의 농도도 그러하다. 삶을 충분히 살아내지 않은 사람과 같다. 사촌 막내형이 그러하고 고종사촌 형이 그러했다. 그들과 나의 어린 시절의 그 부드러웠던 음색과 침착한 행동들. 커다란 나무 같이 든든했던 그들의 힘겨운 성인의 삶과 같다. 하룻밤 사이에 운명을 달리한 것처럼 봄비 안에서 나는 이후의 것을, 이후의 이후의 시간을 살아내는 모색을 한다. 재스민 꽃이 흙담에 기대 핀다. 한 달 가량의 시간이 주어진다. 쟈스민은 맹렬하게 흰꽃을 피워내고 향기를 뿜는다. 간결하지만 강렬하다. 생의 주어진 여력을 다한다. 그러나 짧은 인생을 마친 이들의 생에는 향기는 고사하고 단지 술에 기대고 살아야 했던 고된 노동과 고독이 가득하기만 하다.


다시 간헐적인 비가 내린다. 이곳의 비는 재스민의 키를 더 키운다. 흰 꽃이 빼곡하게 재스민 줄기에 매달린다. 다시 먼 곳에 그가 여기에 가득하다. 그렇다면 그란 누구인가. 다시 나의 정원에 소환된 그는 누구인가. 쳇 베이커의 우울한 재즈 트럼펫을 오랜만에 꺼내 틀어놓았다. 그가 트럼펫을 통해 되살아났다. 비를 머금은 트럼펫은 내가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다. 지나친 멜랑콜리는 자칫 유치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히 쳇 베이커는 저의 음악만큼의 생을 살았다. 다시 간헐적인 비가 내린다. 봄의 곁에서 볼 살 없는 그가 여기에 가득하다. 수령 마을의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로 간다. 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빗소리를 듣는다. 쳇 베이커는 마지막 콘서트를 끝내고 자살했다. 그의 약물에 찌든 얼굴에는 그의 트럼펫이 재즈가 가득하다. 낡은 음반에서 나는 소음도 함께 들어 있다. 나무 밑은 물그림자가 어둑하다. 굵은 빗방울 잎사귀에 모였다 떨어진다. 그때 나는 발음 한다. “봄비” 봄비는 한 번만 깨운다. 두 번 깨우지 않는다. 곧 돌이 돌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빗속으로 흰나비가 날아가듯 돌이 돌의 여행을 시작할 것이다. 아 봄비. 희고 무거운 나비의 날갯짓이 멈출 때까지 봄비. 너를 기억에 지워낼 때까지의 봄비. 날 것에 등이 젖고 까마귀 울음에 흰 꽃이 필 때까지의 봄비. 마을 당산나무 아래서 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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