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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Dec 25. 2021

동백

   동백 

  


  팔린 집을 허무는 막노동 판에서 포클레인에 으스러지기 직전의 동백나무를 집으로 데리고 왔다. 비가 내리던 초겨울이었다. 나무는 갈증에 겨워 이파리가 바싹했다. 모래와 자갈이 많은 마당 한 켠에 구덩이를 팠다. 겨울비를 맞았지만 묘한 쾌감이 일었다. 나무의 몸이 이러려나 했다. 잔돌멩이 들은 하나 같이 유선형의 모양을 했다. 아주 오래전 이 마당은 강줄기였거나 샛강이 분명했다. 봄이 왔고 붉은 꽃숭어리를 발치에 떨구었다. 흥건하게 젖은 발치에 붉은 아우라였다. 난 작업실의 흐린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눈에 담고 눈에 녹였다. 마음까지 닿기 전에 살결로 느끼고 싶었다. 지지난해 동백나무를 두고 작업실을 옮겼다. 살던 마을에 할머니에게 집을 맡겼다. 하지만 잔가지가 다 잘려나간 나무를 이듬해 담너머 나무 보러 갔다가 보고 말았다. 풍성한 나무의 풍채가 왜소하고 추레했고 영양실조에 걸린 듯 했다. 기분이 언짢았다. 염치없지만 나무를 다시 가져가야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좀 민망한 얼굴을 했다. 이웃의 힘을 빌려 나무를 캐고 트럭에 옮겨 지금의 작업실로 옮겼다. 흙담 옆 동향의 아침 햇살을 받아먹고 하루 종일 풍성한 햇빛에 살게 했다. 구덩이를 팔 때는 잔돌멩이 하나 없었다. 하지만 마음은 무거웠다. 괜히 나무를 빼앗아 온 기분이 들었다. 나무를 넘겨준 할머니는 잘 키워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잔가지가 잘려나가기 전의 나무를 상상했다. 나무의 운명은 몇 번은 이사를 한 것이냐. 나와 함께 앞으로 또 몇 번이나 작업실을 옮겨 다니며 이사를 하게 될지도 모르고 나 죽고 나면 누군가 나무의 밑둥을 잘라버릴지도 모를 일, 몇 해를 간극으로 제대로 핀 동백을 보지 못했으니 다가올 봄 나무의 발치에 널브러진 동백을 상상하면서 흥건하게 나무의 이파리 줄기에 물을 뿌렸다. 꽃몽우리가 맺혀 있다. 때를 기다리고 있다. 숨이 멎고 긴장감이 서려 있다. 붉은 기미를 살짝 보여주고 있다. 겨울의 마당에 식물들 모두 겨울 잠에 빠져 있고 유일한 볼 거리다. 유일한 이야기 상대이다. 바람에 메마른 바람만 연신 불어대고 비가 내리지 않는 몹시 가문 날들의 연속이다. 등에 흥건히 빗줄기 내리던 그 겨울의 동백나무를 심었던 날을 다시 기억한다. 세상의 나무들 등 시린 겨울에 눈이 내리고 이파리들이 눈을 얹은 모습을 보는 것도 좋지만, 나는 동백이 흥건한 나무의 발치가 그립다. 제 발등에 붉은 꽃숭어리를 뚝뚝 떨궈놓는 선물. 처연하고 싱그러운 남향 숨결을 가진 사람 같으다 바라보겠으나 만날 수 없으니 나무에게서 그런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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