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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Feb 04. 2022

희미하게


 희미하게

 - 김정용

 

 산봉우리 위를 흰 구름이 스친 것을요


 노모의 걸음이 허청허청 한 것을요

 허리를 좀 펴라시면 희미하게 젖히는 것을요


 노모보다 먼저 죽을까 봐서

 보푸라기 일어난 옷을 전부 몰래 숨기는데요

 이튼 날 희미하게 입고 있는 것을요


 희미하게는

 보내주는 쪽의 무게인가요

 돌아서 옅어지는 쪽의 무게인가요


 가령


 바다를 향해 등 보이는 이는

 바다의 편으로요, 뭍으로요


 가령

 

 춤에 취해서 꽃을 박차는 나비처럼요

 가는 나비의 발끝이 남긴 여운으로 휘청이는  꽃처럼요


 가령


 희미해지기 위해서 파도로 사는 달은요


 열흘 남짓 황갈색으로 갈음하는 목련에 얹힌 희미한 백옥빛은요


 가령


 장례 후 장의차 내려간 뒤

 내리막길은 나의 언덕에서 흰 연기인 것은

 착시랄까요 승천이랄까요


 가령


 통학 버스 안에서 하차 없이 직진을 해버리는 심경은요

 봉우리를 지나간 흰 구름은 뒤축이 닳아버린 걸 감추고 희미해진 것을요


가령


석등 속에 알전구는 어디까지 희달까요

희미한 빛을 달빛이 쓸어 담았달까요


가령


낮달은 자기 빛에 허덕인 것을요


가령


바람이 털어내도 달라붙어 있는 댓잎의 은비늘 빛은

버들치 같은데요


가령


무너지지 않으려고 희미지는 것은요

희미해지려 사려 깊은 실종은요


그러나 햇살에 볼 비비는 걸 좋아하는

어린것들의 희미한 출현 앞에 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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