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
공적인 사건에 직면한 어떤 순간, 우리는 우리가 거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안다. 거부는 절대적이며 정언적이다. 굳이 논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말하지도 않는다. 주장할지언정 말하지 않고 조용하며 고독하다. 마치 정오의 태양처럼, 거부하는 인간들, 또는 거부의 힘으로 서로 이어져 있는 인간들은, 아직 그들이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공통적인 주장을 했던 시간은 이제 그들에게서도 분명히 제거되고 없다. 이제 남은 것은 환원 불가능한 거부, 바로 이, 어떤 불굴의, 엄격한, "아니오"로 하나 되어 뭉치는 우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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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거부하는 것은 가치가 없거나 중요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건 바로 거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것은 지혜라는 외양을 띠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듣지 않을 것은 바로 일치화 화해라는 제안이다. 단전은 생겨났다. 우리는 너무나 솔직해져 더 이상 공모해 줄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거부할 때 경멸하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그저 할 수 있는 한 익명으로 조용히 거부한다. 거부하는 힘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와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그 유일한 이름으로부터 나와 완성되는 아니라, 말할 수조차 없는 자들의 너무나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시작으로부터 나와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거부하는 게 쉬워졌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이런 힘을 연습하는 데에 그렇게 많은 위험은 따르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아마 우리들 대부분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거부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거부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사유의 준엄과 표현의 절제를 통해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고 버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제부터 우리들 각각의 주장이 증명해야 하는 것은 거부의 힘이다.
<모리스 블랑쇼, 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