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창가에서

창가에서-잊다

by 일뤼미나시옹



단순해지려고 옷장도 없이 살아도 어느샌가 잡스러운 것들이 하나씩 집 안에 채워진다. 지난밤에는 주방에 구석구석을 뒤지고 닦아내고 먼지를 훔쳤다. 집 안에 들일 때는 사물들 하나하나에 고유성과 이름이 부여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쓸모의 측면에서 밀려나거나 유행의 물결에 밀려나고 나면 일순간 잡동사니 취급을 한다. 잡동사니들에게도 생각의 결이 묻어 있다. 집착한 것과 어처구니없는 것, 사물에게도 걸맞은 아우라가 있다. 사물을 어떻게 사용했는가에 따라, 사물이 사람을 만나서 발하는 아우라는 곧 생활한 자의 아우라 이기도 하다. 그래서 옛 것을 좋아하고 집착하고 또 수집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혹자는 남이 사용하던 것, 죽은 이의 물건을 사용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이도 있다. 두 방편에서 벗어나는 내게는 그저 오래되고 묵은 사물들은 정리의 대상이다. 애정을 두고 모았거나 사용한 것 중에 집착이 가는 것을 최소한 배제하고 싶다. 한마디로 물건이든 사물이든 사건이든 하물며 지난 사랑에서건, 지나버린 영광이나 고통의 광휘에서건, 되씹거나 집착하고 싶지 않은 이유이다. 모조리 정리해 버린다. 부엌의 찬장 싱크대 주변엔 생각보다 아주 많은 정리 대상의 사물이 있다. 유리병, 각종 양념병과 작은 반찬 그릇, 빈 깡통, 페트병, 먼지와 기름때, 휴지 조각, 죽은 벌레.. 치우고 닦아낸다. 서재를 정리한다. Chill 음악을 틀어놓고 고민 없이 애착 없이 쓰레기를 분리하고 묵은 책을 골라낸다. 대문 밖에서 골목을 빠져나가면 신작로변 공동 쓰레기장? 에 내다 버린다. 그리곤 멀리 저수지가 있는 곳까지 걷는다. 금성이 담장 아래 핀 별수국처럼 피어 있다. 곁에 달이 멀거스레 보고 있다. 걷는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피는 밤의 산책을 한다. 미소는 몸에서 울리는 범종의 공명이다. 간이역까지 걷는다. 간이역은 나의 복식호흡이다. 간이역에 가면 나는 충분해진다. 지난버린 시간에서 미지의 시간까지. 잊힌 사람에서 잊힐 사람에까지. 충분히 지치고 나서 돌아온다. 대문을 열고 작은 돌의 정원에 물을 뿌린다. 환유가 된 산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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