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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창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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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뤼미나시옹 Oct 30. 2023

창가에서 - 가을나무 밑으로

  가을나무 밑으로 


  가을나무 밑으로 걸어갔다. 전신에 가을 햇살 칭칭 감고 있는 가을나무 밑으로 갔다. 나무가 고향이고 나무가 성소이며 나무의 신자인 새들이 반짝거리는 성가를 부르는 가을나무 밑으로 갔다. 잎잎마다 금도금을 한, 종이창문처럼 바람에 떠는 가을나무 밑으로 갔다. 올려다보면 페가수스 천정을 한 가을나무 밑으로 갔다. 나무 밑에 멈춰서면 나무만이 알고 있는 나의 잠적. 향피리 불며 페루나 안달루시아 골란고원으로 달그림자 끌며 도보여행하고 온 가을나무 밑으로 갔다. 피로와 인식 그리고 어떤 해탈의 모습으로 서 있는 가을나무 밑으로 갔다. 사랑을 잃어버린 이들의 발치에 내려놓는 가을나무의 말들은 페루나 안달루시아 골란고원의 발음처럼 알아들을 수 없지만, 눈으로 들어와 마음에 스미는 나무의 말은 오후가 다 가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안다, 사랑이 뭔지 당신은 아는가? 하고 묻는 이의 마음이 가을나무 안에 있다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돌이 돌의 여행을 시작하는 것처럼, 이파리들 바람여행을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들 마음에서 사라지는 감정들. 우리들 마음 속 페가수스 무한 별무리 닮은 세세한 감정들 하나씩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어찌하겠는가. 세월과 일상과 밥벌이에 빼앗기는 은밀하고 사소하며 내밀한 감정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어떤 물길 우리 옆을 흘러가며 우리를 아프게 하듯, 어떤 노래는 따라 부리지 않아도 우리 입술에 묻어 바르르 떨듯. 어찌하겠는가, 돌이 돌의 여행을 하며 깎여나가는 제 부위를 알아챌 수 없듯, 우리에게서 사라지는 그 무엇. 그것이 그리워 내가 가을나무 밑으로 걸어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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