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착한 사마리아인 (틀라클루아 모작)
착한 사마리아의 비유는 잘못 해석될 수 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나와 다른 이질적인 이웃을 사랑하는 말이다.
나와 같은 이웃은 즉 내 생각과 삶의 방식 언어가 같은 공유된 이들이다.
그러면 동일한 사과 방식 속에서 '이타성보다는 배타성'의 삶의 형식을 취할 수 있다.
즉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닌 이들은 나의 이웃이 아니므로 배타적으로 밀어내 교외로 내쫓는다.
다르게 말하면, 나와 동일한 생각과 삶의 형식 언어를 가지 이들이 다수가 되면 거기에 집단의 광기가 발생하면
파시즘이 작동한다. 이와 같은 경험을 역사적으로 1. 2차 대전을 통해 극단적으로 인류가 체험한 경험이기도 하다.
게르만의 우수성에 도취된 나치즘은 유대인을 600백만 명이나 학살했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 이와 같다. 십자가를 앞세워 십자가에 반하는 이슬람과 예수를 죽인 원죄를 원흉으로써 유대인을 2천만 명 가깝게 학살했다. 미국의 백인우월주의는 인디언을 미국 땅에서 씨를 말려 버렸고, 통계상으로 수 백만에서 수 천만 명의 인디언이 학살당했다.
내 이웃을 사랑해서 일어나는 안된다. 내 이웃 너머 저 산 머너 바다 건너 내가 알지 못하는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나와 이질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고, 나와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 무신론자들 동성애자들 나와 생각이 다르게 다르게 옷을 입고 낯선 음식을 먹는 이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이들.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인류 보편성의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차이의 반복을 경험하고 살아야 한다. 같은 일상 안에 무수한 차이를 발견하고 차이를 생성하며 살아야 한다.
나의 이웃 조차 사랑하지 않으면서 굳이 먼 이웃을 사랑할 이유가 있을까.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이웃 내 옆의 이웃을 사랑해보라.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바로 다음날 나와 다른 이웃을 경멸하는 언어를 만들어 낼 것이다. 나와 같은 이웃이 모여 보더 먼 이웃을 비방하고 경멸하고 증오하면서 ,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선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