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으로, 깡으로, 글로

[동네 여행자] 19

by 정원에

3년이란 시간 동안(노래 가사 아님) 내 몸처럼 전 국민이 챙겼던 마스크. 한번 벗으니 해방감에 잘 쓰게 되지 않는다. 3년이 사흘처럼 훅하고 지나쳐 버리는 것 같다. 다 잊히는 것 같지만, 불과 두어 달이다. 공식적으로 실외 마스크 착용 해제가 된 게. 수요일부터 걸을 때마다 누가 내 다리를 스멀스멀 비비는 것 같다. 발꿈치끼리 서로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머리 주변으로 굵직한 구렁이 두 마리가 똬리를 틀고 계속 조이는 것 같다. 목구멍 깊숙한 곳을 틀어 막고 있는 가시 박힌 축축한 솜뭉치가 답답하다.


3년 동안 한 번도 걸리지 않은 감기 몸살. 마스크를 벗은 지 두 달 만에 찾아왔다. 아니 증상은 몸살감기가 더 맞다. 조각 조각난 온몸의 근육이 이렇게 이어져 있구나를 움직이는 매 순간 알 수 있는 정도니까. 등근육이 이렇게 많았나, 컸나를 체험, 탐사 중이다. 결정적인 건 수요일 밤부터 제2의 변성기도 진행 중이라는 것. 말을 해야 하는 특성상 이게 제일 어려웠다. 게다가 그제, 어제. 이번 주 월, 화에 컨디션 괜찮을 때 기분 좋게 수락했던 보강 수업이 4개 반이나 대기 중이었다. 특히, 어제는 원래 내 것까지 1,2,3,4,5 연속 강의.


어찌어찌 다 해결하고 나니 판토마임(?) 실력이 꽤나 늘어난 것 같다. 그러는 사이사이에 앞에 있는 아우님이 남씨네 백도라지청을, 정성이 넘치는 검은 관장 진액(PPL 아님)도 타서 손수 건네주면서 그런다. 형님이 빨리 나아야, 회식을 하죠라고. 원래 콧물은 주르륵이지만, 정말 눈물 찔끔이다. 나란 사람, 참 이럴 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고마워서. 게다가 오후에는 심폐소생술 연수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아파요, 하고 조퇴하는 이들이 많았을 텐데, 요즘은 못 그런다. 3시간 강의 끝 마지막 화면에서 암호 같은 '코드'를 살짝 보여준다. 알려주는 링크에서 그 코드를 넣고 내 개인정보를 입력해야 이수 완료. 힘들다.


정말 그렇게 가장 길고 긴 금요일을 다 채웠다. 기특하다. 몇 해 전 우리 반 꾸러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난 돈 주는 사람한테는 잘한다, 고. 내가 지금 그 꼴인가, 아니 우리 다 그렇게 살고 있는 거네. 아내를 픽업하러 달리는 차 안에서 또 밀려 올라오는 생각. 아, 그 뭐 아무개 연예인이 약을 하고 운전을 했다는 게 이런 상태일까, 또 누구누구가 속옷 차림으로 대낮에 거리를 휘청거리면서 활보했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하고. 차가 단단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핸들도 말캉거리는 젤리 같았고. 대시보드가 내가 앉은 의자와 합작해서 나의 온몸을 감싸 앉아 주는 것도 같았고.


아내가 만나자마자 묻는다. 몸은 좀 어때? 하루 만에 만난 아내에게는 판토마임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답을 했다. 어. 나. 변성기가 왔어. 내 목소리가 배터리가 얼마 안 남은 오래된 로봇 음성 같았다. 아내가 웃으면서 그런다. 오~ 다시 젊어지는 건가? 우리 뭐 먹을까?. 그제야 다시 핸들이 단단해졌다. 접고 있는 오른쪽 무릎이 살짝살짝 부딪히는 대시보드 아랫부분이 딱딱하게 느껴진다. 아내는 피곤해하는 나를 보면서 그랬다. 집 앞에서 이것저것 장을 좀 봐서 집에서 만들어 먹자고. 배려다. 보통 두 번 중에 한 번의 금요일엔 맛난 거 먹고 들어 간다. 어제는 먹고 들어가는 날. 대신 집 앞 슈퍼로 향했다.


이것저것 사면서 아내가 그런다. 와, 또 없네, 먹태깡. 이름만 들었지, 볼 수가 없어. 뭐? 그게 그렇게 인기야? 그럼. 그렇게 커다란 슈퍼를 두 바퀴째 돌았다. 그런데, 음료수대 쪽에서 바깥쪽으로 이어진 유리문을 벌컥 열리면서 매니저분이 카트를 하나 밀고 매장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 시선에서 오른쪽으로 휙 하고 옆 매대 사이로 사라졌다. 그때 나는 봤다. 초록색 봉지, 흰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깡, 깡, 깡, 깡 하고 여러 개가 쓰여 있는 것들을. 그때 아내는 반대쪽 유제품 코너를 바라보고 뒤돌아 서 있었다. 어, 자기야. 자기야. 저기 먹. 태. 까.... 아내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그 카트를 계속 따라갔다. 몸도 짐도 무거운 나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평소 수줍음 많은 아내다. 평소 기본기(?)가 충실한 아내다. 카트 안에 있는 물건을 꺼내지는 않는다. 상품이 진열되는 것 정도는 기다린다. 그렇게 여섯 봉을 꺼내 왔다. 네 봉, 두 봉으로 2회에 걸쳐서. 계산대에서 얼굴은 익숙한 중년 직원이 우리를 향해 웃는다. 그러면서 일러준다. 예약(과자도 예약이 되나요?)한 사람이 오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방금 점장님이 들어서 팔려고 내놓은 거라고. 그걸 타이밍 좋게 잘 잡으신(?) 거라고.


로또에 당첨된 것처럼 집에 와서 사진을 찍고 여섯 봉을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는 아내가 고맙다. 아마, 옆 동네로 이사 온 내 친구 중학생 형제들한테 가져다줄게 뻔하다. 덕분에 몸살감기가, 감기로 내려앉은 기분이었다. 뜨끈한 소고기 미역국을 같이 한 그릇 먹으니 온몸이 뜨근해진다. 하이볼 장인인 아내는 저녁 대신, 먹태깡 한 봉지를 고이 뜯고 앉아 뉴스를 듣고 있다. 아니, 퇴근하니, 먹고 나니 그냥 힘들다. 목에서는 계속 가래 가래한다. 답답하다. 고래고래 소리 지를 때가 순간 그립다. 한참을 하이볼 아내와 마주 앉아 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겸손은 힘들다(PPL임).


예방 주사를 싫어한다. 옛날 사람인 것도, 특별한 사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원래 그냥 그랬다. 그러다 보니 한몇 년 만에 한 번씩 감기를 앓으면 크게 앓는다. 자체 예방 접종 주간 정도. 이번주가 그랬다. 참 긴 한 주였다. 그런데 예전하고 다른 건 자연 치유력이 분명 더 커진거다. 새우도, 고구마도, 감자도, 양파도 이제는 먹태마저도 깡으로 버티는 데. 나라고 못할까 하는 객기, 아닌 팩트가 더 강해졌다. 그건 바로 글쓰기다. 지금도 손가락에 힘이 덜 들어가지만, 예전 같으면 한 이틀 제대로 앓아누웠을 나다.


그런데 매일 조금씩 글을 쓰다 보니 내 몸에 들어온 감기가 나한테 놀란 듯. 어, 뭐야, 같은 몸 맞아? 예전하고 다른데, 가래 가래에, 기침에, 열에, 근육통까지 가져올 건 다 가져왔는데, 뭐지?. 그래, 맞다. 이제는 쓰지 않으면 하루의 시작도, 한 주의 마무리도 더 밋밋하다. 분명 그렇다. 그 일상에서 되지도 않는 기록을 남기는 건 다 미래의 나를, 나를 둘러싼 모두에게 남기고 싶은 유산이다. 괜찮다. 다 괜찮다. 유명하지 않아도, 잘 써지지 않아도 괜찮다. 엘도라도는 직접 체험하지 못하더라도, 글로라도 자꾸 나에게 말을 걸다 보면 진짜 황금 덩어리를 발견할지도. 그나저나 노가리도 깡으로 살기 시작했다는데, 게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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