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여행자] 23
나는 새벽이 참 좋다. 읽고 쓰고 나한테 말을 걸 수 있는 시간이어서. 무엇보다 나의 하루를 더 오래 만날 수 있는 게 제일 좋다. 짙은 어둠 속에 폭하고 촛불하나 켜놓은 듯, 바람에 냄새에 흔들거리는 13층 공중 그네에서 6시쯤 내리면 나의 하루의 1부 끝, 2부 시작이다. 그런데 자기 하루의 1부를 일찍 끝내고 같이 2부를 시작하는 이들이 의외로 참 많다. 나의 1부와 2부 사이의 동선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익숙한 타인들 말이다. (아마 나 혼자) 심리적 거리감이 아주 가까워 편안한 이들. 그들을 소개해 볼까. 이번주에도 어김없이 만난 익숙한 타인들.
안전하게 또 한 번의 출근 완료, 내 하루의 2부가 시작되는 시각은 보통 7시 10분 무렵이다. 그 시각 3~4분 전. 비보호 좌회전을 하기 전 도로 오른쪽 공터. 날이 맑아도 궂어도 마치 입으로 췩췩췩 소리를 낼 것만 같은 춤추는 러너를 만날 수 있다. 차로 스쳐 지나가기 때문에 앞 차가 조금 있다 해도 불과 몇십 초 정도. 60대 후반, 70대 초반 정도의 남성. 마른 체형의 나보다도 10kg는 덜 나갈 것 같은 자그마한 체구. 하지만 스텝과 자세는 운동 좀 해보신 분 같은 느낌.
분명히 달리는 것 같은데 거의 제자리에 있다. 자그마한 스텝을 계속 밟으면서 양팔을 가슴까지 접어 올리고 느릿느릿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스트레칭 같기도, 춤 같기도 한 자세로.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냥 가벼워 보이면서도 유쾌해진다. 좀 더 오래 보려고 차로 느릿느릿 움직인 적도 있다. 내 하루의 2부 시작에.
주차장 주변에는 다 같아 보이는 1톤 트럭들이 매일 아침 서너 대는 올라와 있다. 본관 가장 아래 베이스먼트 쪽 급식실 입구에서 한 대 한 대 시동을 켠 채 대기중이다. 아침마다, 아이들 점심 먹일 식자재 배달 트럭들이다. 가운, 모자, 장갑까지 하얗게 낀 배달 기사들. 눈이 마주치면 먼저 목례를 하시는 50대 기사님, 목례를 먼저 해도 멋쩍어하시는 30대 기사님도 그냥 신선한 힘이 느껴진다.
트럭 엔진소리처럼 역동적이기까지 하다. 냉한 아침 공기를 보드라운 카시미론 담요로 살짝 덮어 주는 것처럼. 그렇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함께 움직인다. 주차장에서 5층까지 걸어 올라간다. 오래된 건물이라 엘리베이터는 없다. 있어도 타지는 않았겠지만. 그런데 이미 그때 본관 건물에 몇 개의 교실 창문에서는 빛이 운동장으로 새어 나온다. 2층은 복도불까지 켜져 있다.
일부러 느릿느릿하게. 그 짧디 짧은 시간 동안 오늘 2부에서 가장 중요한 공적인, 사적인 업무처리 목록이 휘리릭 머릿속에서 정리가 된다. 그때가 아주 선명하게 머리가 맑아진다. 보통 그렇게 2층에서 3층 사이롤 돌아 올라갈 무렵, 여사님을 뵐 수 있다. 학교 구석구석 청소를 도와주시는 환경미화 여사님. 언제나 빨간 립스틱을 바른, 70대가 훨씬 넘은 것 같다.
양손에 물동이, 빗자루, 재활용 비닐봉지, 화장실에 채워 넣을 큰 두루마리 화장지. 한꺼번에 정말 많은 것들을 들고 다니신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눈이 입보다 먼저 인사를 건네주세요. 아, 선생님, 안녕하세요.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고 눈이 항상 웃고 계셔요. 심신이 지치고, 힘들어도 티를 낼 수가 없어요. 그냥 에너지가 너무 해피해요. 내 하루 2부 시작이.
어둑한 3층, 4층 복도 불을 하나씩 켜면서 5층까지 올라간다. 3층, 4층, 5층의 또 한 번의 하루를 밝히는 기분도 꽤나 좋다. 그런데 3층에서 4층으로 올라가는 4층 입구. 그 앞에서는 벽에 붙은 스위치를 탁하기 전에 몇 초를 기다려 본다. 어둑한 4층 복도에 딱 한 교실, 8반 교실만 언제나 불이 켜져 있다. 앞문에 있는 가느다랗게 길쭉한 유리문으로 교실 한가득한 빛이 나에게 달려나와 인사를 한다.
그 빛을 따라 자연스레 시선이 좁은 창문틈으로 따라 들어가면 그 끝에 언제나 머리를 숙이고 아침 공부를 하고 있는 한 남학생이 있다. 몇 번이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는 체를 하고 싶을 정도로. 앉아서 책을 보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그런데 어느 날 한번 일이 있어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학교를 들렸어야 했는데, 그때도 그 학생은 그 자리에 그렇게 앉아있는 거다. 조는 것도, 휴대폰을 하는 것도 아니고.
새벽에 글을 쓰다보면 가만히 생각이 올라온다. 새벽에 맞이하는 1부가 없었던 오랜 기간을. 그러면서 아, 하고 느끼게 된다. 위에서 만난 이들의 2부가 내 눈에,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러면서 이 새벽을 참 잘 간직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어제처럼 아버지와 오랜만에 막걸리 한잔씩 나눠 마신 날에도 비슷한 시각에 몸이 일어나지는 이유다.
나이를 먹으면 아침잠이 없어진다고들 하는데, 그 반대인 듯 하다. 아침잠을 없애려고 나이를 먹는 것 같다. 이 새벽마다 나에게 주어지는 선물을 잘 받으려고. 그래서 지금이 참 좋다. 다행이다. 고맙다. 이 모든 것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내 하루의 2부가 이어지기를 바랄 수 있는 오. 늘. 지. 금. 이.
.....한줄/새벽이어도 늦은 밤이어도 내가 나에게 집중해볼 수 있는 시간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