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의 소리

[ 문장보관소 ] 20

by 정원에

나는 어릴 때 틈만 나면 걸어 다녔다. 크면서 걷는 걸 좋아했다 싶었지만, 시작은 그게 아니었다. 버스를 타는 게 싫어서였다. 멀미 때문이었다. 중2 때 2박 3일 수학여행 기간 내내 버스에 오르기만 하면 멀미를 했던 기억까지 있다.


지금도 그때의 매캐하고 비릿하기까지 한 버스 냄새가 기억난다. 버스의 거친 엔진 소리를 들으면 멀쩡하다가도 느닷없이 내 몸이 알아서 내 속을 다 밀어낼 준비를 하는 듯했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디를 갈 때는 무조건 버스를 타야 했다. 시골에서는.


지금은 대부분의 버스 엔진이 뒤에 있다. 그런데 그때의 버스는 앞쪽에 엔진룸이 있어 내부가 참 특이하게도 생겼었다. 사진처럼 운전석 옆쪽에 커다랗게 불쑥 튀어나온 형태였던 거다.


승객이 많을 때는 빼곡하게 서서 가야 했다. 어린 나는 엄마, 아주머니들의 양보(?)로 이 엔진룸 위에 걸터앉아 구불구불 흐르듯 쏟아져 내려가는 버스를 온몸으로 견뎌내야 했었다.


그런데 어른들의 잦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나오는 열기, 소음, (기름) 냄새의 쓰리콤보가 내 속을 마구마구 할퀴고 뒤집어 밀어내려, 밀어내려 하는 공간이었다. 싫다고 싫다고 해도 우람한 아주머니들의 팔뚝을 이겨낼 수는 없었으니까.


아주머니 보따리 옆에 기대어 그렇게 어딘지도 모르게, 쳐다보지도 못하고, 쭈그려서 마른오징어만 씹어대야 했다. 오히려 보따리 속에서 나던 이름 모를 나물 냄새, 물컹한 미역 냄새가 오히려 더 좋았었다.


그래서였을까.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되도록이면 버스를 타지 않으려고 하는 나를 발견하는 건 자연스러웠다. 어쩔 수 없이 단체 활동을 위해 버스를 타야 하는 상황이라면 되도록 앞쪽으로 앉으려 머리를 쓴다.


그런데 그 앞자리는 높은(?) 분들 차지이거나, 나보다 더 중요한 것들 - 술, 안주, 과일, 짐가방 등 - 이 차지하는 자리였다. 담임을 할 때는 그나마 내가 제일 높으니까(??) 시야가 탁 트인 당연히 맨 앞자리가 가능했다.


하지만 단체 연수나 컨퍼런스를 갈 때는 쉽지 않다. 지금이야 그런 상황이 아니지만 경력이 십여 년이 되기 전에는 버스는 음주와 가무의 화려한 이동 공간이었으니까. 이 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웃픈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때는 일천구백구십일 년 어느 봄날. 대학생이 된 것도 신기했지만, 서울이라는 곳에서 처음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한 지 두어 달 정도 지날 무렵. 서울살이는 모든 게 정신없고, 난 가진 게 없고, 그냥 모든 게 다 비쌌다.


학생이라 더 그랬겠지만 혼자 살면서 알바로 생활비를 보태고, 장학금으로 등록금을 충당하고 있어서 마음이 항상 쪼글거렸었던 그때다. 아마 그때쯤이지 싶었다. 나중에 결혼해서 살아도 서울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 는 생각을 했던 게.


지금 아내와 그 부분이 '딱' 맞게 살고 있어 참 다행(?)이지 싶다. 그랬던 나만의 버스 트라우마(!)가 다시 살아난 게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이었다. 대학 새내기 - 참 그때는 새내기라는 말도 없었네. 그냥 신입생이었네 - 가 된 지 두어 달 지났을 때였을 거다.


여전히 난 버스를 타지 않고 더 신기한 지하철로 지하철로 서울과 경기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무렵 아마 피자를 처음 먹어 봤을 거다. 어느 극장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릴 때 지금의 휴대폰을 대신했던 게 가판대 신문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야구팀 이야기가 1면에 나온 스포츠 신문을 읽고 있었다. 지금은 모 스포츠 신문사에서 아주 잘 나가 는 일 년 선배와 급격하게 친해지던 사이었다.


우리 둘의 공통점은 세 가지가 되었으니까. 같은 팀, 지방 출신, 자취생. 자식을 타지로 떠나보낸 부모님들의 걱정은 단 하나다. 다치지만 말고, 아프지만 말라고. 그렇게 잘 먹고 잘 지내라고.


특히, 서울은 위험(?)한 동네라고. 눈뜨고 있는데도 코를 베어가는 곳이라고. 귀에 딱지가 보루박스 왕딱지만큼 생길 정도로, 듣고 또 들었다. 그래서 그날도 버스 정류장 옆에서 스포츠 신문을 하나 들고 서 있었다.


수없이 버스가 왔다 갔다 섰다 갔다를 반복하는, 아주 한가로운 오후였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낯선 팀으로 이름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그런 저런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 정류장 쪽에서 굉음이 들렸다. 고막이 찢어질 듯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분명. 엄마한테 전화 한 통도 못하고 죽는다 생각했다. 무조건 살아야지, 반대쪽으로 달려야지만 생각을 했었다.


신문가판대 맞은편에 큰 극장이 있었다. 그 사이에는 좁은 골목이 있었는데, 그 안쪽으로 본능적으로 몇 걸음 달렸다. 도로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런데 이상했다. 극장 앞에 모여 앉은 어느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내 앞을 지나치는 이들은 그냥 살랑거리며 걸어 다녔다. 신문 가판대 어둑한 네모 안쪽에서 흰 눈동자만 잠깐 나를 쳐다봤을 뿐이었다.


그제야 안도한 마음으로 도로를 쳐다봤다. 폭탄은커녕 폭죽도 하나 터지지 않았다. 그냥 원래 장면 그대로였다. 그렇게 나는 조심스레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의 그런 행동은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가슴은 여전히 버둥거리고 있었다.


그 이후로 계속 궁금했었다. 그날의 굉음이 뭐였는지. 그러다 한참을 잊고 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어느 상황에서 자연스레 알게 된 것 같다. 싱겁게도. 요즘도 가끔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들린다. 그 굉음이.


그건 대학생이 되기 전에는, 서울에 올라오기 전에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유형의 버스가 내는 버스 방구소리였다. 맞다. 버스에서 사용하는 에어브레이크 소리다. 컴프레서가 일정 압력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배출되는 거였다. 그게 그 굉음의 정체였다.


우 씨. 그런데 지금도 멍하니 버스옆에 있다 보면 깜짝깜짝 놀라긴 한다. 이 얘기를 듣고 있던 아내가 '나도, 나도. 지금도 놀라'라고 맞장구쳐 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시험 시간, 자습 시간. 고요할 때 가끔 뽀~옹한 소리가 들린다. 이건 진짜 방귀다. 선생나이 얼마되지 않았을 때는 나부터 당황했다. 버스 방구를 기억하면서. 심지어는 범인(?)을 찾아내려고 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은 물증(!)이 없어 불가능하다. 지금은 애들이 괄약근이 더 잘 발달했는지 거의 그런 경우가 없다. 아 있다. 3월에 딱 한 건. 만약에 수업 중에 그랬다면 - 그럴 때는 보통 괄약근 힘 조절에 실패한 - 잠들어 있는 아이이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가만있지만, 비슷한 녀석들 중 몇몇은 킥킥거린다. 그러면서 누구 야하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럴 때 나만의 대처법이 바로, '조용. 버스방구도 아닌데'라고 짧게 외친다.


뭐래?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아이들이지만 나 혼자 픽하고 웃고 넘긴다. 지금 이 새벽에도 저 아래 어둠 속에서 첫차는 연신 방구를 퓽, 퓽거리면서 오늘 하루를 궁둥이의 힘으로 시작하는 가 보다.



시골버스 _박덕중


사람 수보다 더 많은

보따리를 태우고

낡은 시골 버스

낡은 엔진 소리 숨이 찬다


보따리가 보따리에 짓눌려

미나리가 파김치 되고

무우가 흰 살 까놓고

깔깔거리고 있다


창 밖은 구슬비 내리는 데

딸아이 낡은 랜드로바 신고

홍단풍 지는 브라우스

해바라기 핀 통바지 입은

시골 아낙네 주먹 속엔

고추나무, 가지나무가

온몸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시골 버스 속엔

고추나무, 가지나무

바께쓰, 세숫대야

미꾸라지, 붕어 새끼도

거품을 내며 함께 타고 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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