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따사로운 봄볕이 내려앉은 물리치료실의 창가 쪽 푸른 침대 위에서 나른함을 느끼고 있었다. 왼쪽 무릎에 장치를 설치한 채.
웅웅, 삑삑거리는 기계음과 물리치료사의 간헐적인 안내 소리만이 공간을 채우는 그때. 한 남자의 가랑가랑한 목소리가 산만한 정적을 깼다.
마치 폐렴에 걸렸다 많이 나아진 듯 탁한 가래 섞인 목소리였지만, 그는 또박또박 천천히 말을 내뱉고 있었다.
"저기, 제가 퀴즈를 내볼게요. 세 문제를 낼 건데요, 맞춰보세요. 맞추시면 맛있는 걸 사가지고 올게요"
느닷없는 제안에 내가 잠시 당황스러웠다. 혹시나 눈치 없는 어르신이 아닐까 하는 걱정에 꽤나 도톰했던 커튼마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냉담하거나 무관심한 반응이 있을까 염려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 편안한 목소리의 물리치료사가 응답했다. 이내 동료 한 분도 옆에서 기꺼이 거들었다.
"아, 아버님? 문제요? 네. 내주세요, 맞추고 싶네요. 어떤 문제일까요?"
"너무 어렵지 않게 내주세요. 맛 난 거 먹어 보고 싶어요. 호호"
물리치료실에서 흔히 듣게 되는 그들만의 수다가 아니었다. 단골 환자이신 듯한 그 '아버님'에게 친절하고 상냥하며, 밝고 다정한 응대였다. 마치 옹달샘에서 물을 길어 올릴 때 두레박 바깥으로 떨어져 울리는 청량함 같았다.
그 목소리에서는 깊은 위로와 배려가 배어 있었고, 희망 가득한 책임감도 스며 있었다. 젊은이가 나이 든 이를 눈빛, 손짓, 온몸으로 받아 안아주는 진심 어린 환대였다.
내 마음이 뭉근해졌다. 그녀들의 목소리에 노곤함이 단박에 달아났다. 나도 모르게 나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창문을 빼꼼히 열어 그들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처럼.
"어떤 문제일지 궁금해요. 어서 내주세요."
"그런데 아버님은 젊으셨을 때 선생님 하셨어요?"
"아, 아니에요. 제가 그런 일을 할 재주는 못되요. 그런데, 제가 85살 먹었거든요. 아주 오랫동안, 제가 동대문에서 철학을 했어요."
나는 '철학'이란 말에 귀가 더 쫑긋했다. 철학자이거나, 철학적인 삶을 사시는 분이신가 싶었는데, 철학이란 말 앞에 동. 대. 문이 붙어서 혹시 했다.
"예전에는 손님이 많았어요. 가게 간판 이름, 사람 이름 지어 달라 찾아오는 이들이 꽤나 많았거든요."
그랬다. '아, 철학관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기분마저 달달해졌다. 더듬거리는 목소리지만 그 '아버님'의 카랑카랑함 때문에 더욱 그랬다. 분명,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는 이들에게 신이 나신 듯했다.
나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 처치를 받기 위해 커튼을 젖히고 나왔다. 하지만 그 '아버님'같은 분은 보이질 않았다. 나를 안내하는 한 사람 빼곤 물리치료사들 역시 보이질 않았다.
나는 몇 걸음 걸어 다른 배드에 누웠다. 얼마 전에 들어왔다는 안내문이 옆에 서 있는 '물침대'였다. 검은 천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몸이 뒤로 넘어지듯 푹 빠져들었다. 천 안에서 수압이 센 샤워기가 등 어깨 허리 다리를 따라가며 뜨끈한 물을 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러자마자 다시 그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물리치료실을 나서서 종이에 퀴즈 문제를 써서 돌아오신 듯했다.
"자, 여기 문제요. 한 번 풀어 봐 보세요."
"어머. 벌써 내셨어요? 어디 볼게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쳐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귀로 보는 게 더 잘 보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 마주 보는 눈빛이, 마음이.
내가 치료받는 5분 남짓한 시간 동안 그 '아버님'은 다시 사라지셨고, 상냥하게 친절한 물리치료사 역시 사라진 듯했다.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분일까? 저분인가?' 하면서 물리치료실을 나왔다. 그 '아버님'이 어떤 문제를 퀴즈로 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진 않다.
몸이건 마음이건 '아픈' 사람이 무엇으로 낫는지를 깨닫게 된 하루였던 게 좋았을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해주는 게 좋은 지를 엿듣게 된 게 기뻤을 뿐이다.
나는 그곳에서 진정한 철학자들을 만났다. 그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떤 약보다 강력한 치유가 될 수 있음을, 그리고 진심 어린 소통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철학임을 깊이 새기게 되었다.
https://blog.naver.com/ji_dam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