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러 찾아봤다. 딱 일 년 전인 24년 5월 1일. 그때도 그녀는 달렸었다.
잠에서 강제로 깨는 생명체는 인간뿐이라 했나. 각자의 아침 재부팅 속도가 다 다른 이유다.
그런 상태에서 맞이하는 아침에 더욱 신중하게 쳐다보고 음색을 조절하면서 말을 걸어야 하는 이유다.
며칠 전 아침, 출근길. 아내를 골목 안에서 내려주고 다시 큰 도로로 진입했다. 조금 일찍 움직인 탓에 도로가 한산해서 골목에서 2차선으로 단박에 들어설 수 있었다. 내 속도를 줄이면서 왼쪽 방향지시등을 켜고 꽤나 기다려야만 하는 구간인데 말이다.
2차선에 들어서 차와 내가 반듯한 자세를 고쳐 잡자마자 신호등이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바로 앞 신호등도, 그다음 커다란 횡단보도 앞 신호등도, 저 아래 앞쪽 오거리 커다란 신호등도.
그렇게 시야에 한꺼번에 층층이 들어 찬 신호등은 마치 먹구름 낀 하늘 아래 충혈된 눈동자 같다. 내 시선 아래로 살짝 경사진 왕복 4차선 도로. 한달음에 달려 내려가지 않게 물결치듯 출렁이는 도로이다.
얼마 전 새로 포장된 매끈한 바닥덕에 더 진한 검은 파도처럼 일렁거리면서 나에게로 달려 올라오는 듯하다. 그 파도 끝에 내가 올라앉아 울렁거리는 듯하다. 빈속에 날름 비타민B 한 알만 넘겨 버린 어느 날 아침처럼.
내가 올라서 있는 곳에서 저 아래 세 번째 신호등까지 이어진 검은 파도 위로 알록달록한 서퍼들이 자기만의 보드 위에 올라 이리저리 흘러 다니는 듯하다. 그때. 내 앞 신호등 아래 횡단보도에서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 파도 위에 색이 바랜 찢어진 청바지. 일 년 전과 다르게 노란 머리가 반짝이는 검은색으로 다시, 염색이 되어 있다. 분명, 일 년 전 그녀였다. 자그마한 체구였지만 작아 보이지만 않은 뒷모습이다.
옅은 하늘색 청바지만을 빼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올 블랙이다. 그래서 더욱 검은색 파도 위에 우뚝 서 있는 해녀 같다. 그때 갑자기 언젠가 본, 제주의 유일한 이십 대 해녀, 가 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생각을 잠깐 하는 사이, 마치 '우다다다다다'하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하다. 검은건반 사이 흰건반을 밟으며 연주라도 하듯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뛴다. 가슴을 쫘악 펴고 양팔을 힘차게 휘저으면서. 얼굴만 반듯하게 들고 몸의 왼쪽 방향 저 앞쪽을 바라보면서. 주저 없이 당당한 몸짓은 일 년 동안 여전했나 싶다.
그 앞에는, 내 시선이 먼저 가 닿은 끝에는 파란 버스가 한 대 붉은 눈동자 아래 있다. 엉덩이는 아직 정류장을 다 빠져나가지 못한 채. 나의 시선이 그 파란 버스에서 다시 그녀로 옮겨오는 순간. 최종 결심을 한 듯하다. 목적이 분명해졌지 싶다. 양팔을 더 빠르게, 보폭을 좀 더 넓혀 속도를 낸다. 우렁차게 느껴지기까지 하다.
내 눈이, 마음이 더 바빠진다. 파란 버스와 노란 탈색이 된 그녀의 머리를 번갈아 쳐다보게 된다. 붉은 눈동자를 곁눈질로 올려다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핸들 위에 올려진 손가락 서너 개가 그녀의 보폭과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걸 그때서야 느껴진다.
다행히도, 너무 다행히도 그녀의 뒷모습은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다. 확신이 가득하다. 전혀 우물쭈물하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단호하다. '어떻게, 어떻게'가 아니라 '된다, 된다. 나는 된다. 할 수 있다.'라고. 검은 파도 위에 웅장한 배경 음악만 있었다면 그 초조한 기다림이 조금은 더 경쾌했을 것 같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서, 다른 방법이 없어서, 정말 죽기보다 싫지만, 왜 나만 이런 거지 하는,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경쾌함이 차 안을 가득 채운다. 혹시 그 모습이 어제 흘린 눈물을 아침 댓바람으로라도 말리면서 다시 온몸으로 뛰쳐나가는 걸지도 모르겠다 싶으면서도 분명한 건 그 모습은 생명력 넘치는 명랑성이었다. 단테가 말한 비타 노바 vita nova였다.
파란 버스의 후미등이 살며시 붉어진다. 이제 곧 출발하려고 기어를 풀고 브레이크를 힘껏 밟은 거다. 그때,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견고하기만 할 것 같은 문이 실없이, 맥 빠지게 아주 간단하게 열렸을 거다. 그녀 앞에서. 세상 모든 견고한 문이 열리게 만드는 진리를 알려 주듯이 말이다.
언제부터였는지 그녀의 보폭과 박자를 맞추던 저의 손가락은 주인도 모르는 사이 살짝살짝 부딪히면서 손가락 박수를 치고 있었다. 마치 온 세상이 다 짜고 있었듯 그 순간, 검은 파도 위를 내려다만 보고 있던 여섯 개의 붉은 눈동자가 소리도 없이 일제히 초록빛으로 변한다.
순간, lalalala 하는 가사가 경쾌한 카펜터스의 '씨~잉 씨~잉 씽어쏭'이 여기저기서 울려 퍼질 것만 같다. 그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 멈춰 있던 차들도 경쾌하게 다시 움직이는 듯하다. 잠깐 멈췄던 심장마저 다시 뛰고 싶어 안달을 내는 듯하다.
출근길에도 이렇게 경쾌할 수 있나 싶은 아침이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삶의 타이머가 종료되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잘, 많이 살아보고 싶어지는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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