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은 기억한다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 11

by 정원에


아내는 내가 평소에 아무거나 잘 먹는다, 고 자주 말해 준다. 결혼 전 혼자 십 년 넘게 살면서 끼니마다 ‘뭐 먹지?’를 달고 살았던 나로서는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안다.


때마다 먹거리를 준비하는 입장에서는 맛있게 잘 먹으면 그저 고맙다. 싹싹 그릇을 비우면 마음에 쌓인 것들까지 몽땅 비워지는 것 같아 황홀하기까지 하다.

아내의 칭찬은 어머님이 먼저 하셨고, 지금도 가끔 그러신다. '윤서방은 정말 아무거나 잘 먹어서, 뭐든 맛있게 먹어서 좋아' 하시면서.


그런 나도 아내가 보기에는 '유일한 식탐'을 가진 음식이라고 콕 집어 말하고 싶은 게 있나 보다. '어떻게 그렇게 좋아할 수 있나' 하면서도 틈마다 다른 메뉴에 끼워서 준비해 준다. 나에게 만두나 떡국이 그런 것처럼 아내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봤다. 아내가 내게 유일한 ‘식탐’이라고 할 정도로 내가 즐기는 그 음식의 시작이 언제였는지.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하숙을 시작했다. 그때 한 달에 한두 번, 토요일 오전 수업이 끝나면 혼자 맛있는 외출을 하곤 했었다. 동명 극장이 있던 강릉의 한 다리를 향해서.


시내를 가로질러 동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널따란 남대천 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 살짝 언덕 위에 있던 분식집을 가기 위해서였다.


잘게 썰어 산처럼 쌓인 양배추가 초록빛과 옅은 베이지색으로 빛났다. 그 아래 숨겨진, 윤기 흐르는 빨간 양념 속 탱글탱글한 면발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젓가락으로 비빌 때마다 새콤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혔고, 고소한 참기름과 도톰한 깨가 어우러져 기대감에 침이 고였다.


참기름 향이 솔솔 코를 간지럽히고 깨가 흩뿌려진 삶은 계란 반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다.


한 올 한 올 새콤 매콤한 맛을 음미하면서 느릿하게 한 그릇 먹고 나오면 몸이 훅하고 달아올라 있었다.


엄마가 자주 말하던 '든든'하게 먹어야 세상사는 힘이 난다는 것을 옆에 엄마 없이 느낄 수 있었다. 엄마 생각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열일곱의 나는 하숙집의 낯선 공기와 두려움 속에서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해야 했다. 그때 쫄면은 나에게 단순한 끼니가 아니었다. 혼자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세상에 대한 작은 반항이자, 나만의 격렬한 위로였다.


한 그릇 먹고 나온 세상은 온통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했다. 좋다고,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잘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천천히 먹고 하숙방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 시간이 일주일 만의 소중한 산책이었고 휴식이었다.

햇살을 쬐면서 온몸으로 바람을 맞고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내가 나에게 묻고 답하는 아프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런 음식이 있다는 것은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보니 그 순간에 열렬했다는, 그때를 많이 즐겼었다는 증거일 거다.


눈은 속여도 맛은 못 속이듯 세상은 속여도 내가 나를 속이지는 못한다는 의미일 거다. 식탐도 욕심이겠지만 그 욕심 속에는 내가 나로 좀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이 진한 양념처럼 속속들이 베이 있는 좋은 욕심일 거다.


열일곱의 나는 쫄면의 매콤함으로 세상의 쓴맛을 이겨낼 용기를 얻었다면, 가끔 아내와 함께 나누는 지금의 쫄면을 통해 삶의 따뜻한 위안을 얻는다.


쫄면은 이제 내게 ‘쫄지 말라’는 응원 대신,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다정하게 속삭인다.


열일곱의 나는 삶은 계란을 제일 나중에 먹었지만, 함께 먹어 주는 아내 덕에, '윤쫄'이라고 외치는 따님 덕에 지금은 삶은 계란을 먼저 먹는 여유도 생겼다. 그 여유는 혼자 먹던 쫄면의 매운맛을 달콤하게 바꿔준, 가족이라는 가장 따뜻한 양념 덕분일 것이다.




[ 알림 ] _ 8월 23일 [ 위대한 시간 2 ]에 작가와 독자를 초대합니다!!

@일정 : 2025. 8. 23(토) 13:00-17:00 (1차 -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

2025. 8. 30(토) 17:00-19:00 (2차 - 온라인)

https://guhnyulwon.wixsite.com/my-site-2


@참여방법 : 참가비(1,2차 모두 합쳐 3만 원). 아래 신청링크 클릭

@신청링크 : https://forms.gle/3xgDsqr5VYCuQfp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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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로 7월 28일부터 30일 연속 글쓰기 중입니다. 30일 뒤에 한 권의 초고를 완성하려는 도전입니다. 그러는 동안 기존 라이팅 레시피는 잠시 멈춥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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