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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빛 활자의 왕국으로

[ 아빠의 유산 ] 42

by 정원에

하니야, 아빠야

달리기를 시작했다면서?

네가 보내 준 사진을 보니, 너무 멋져!

넌 거기에 아빤 여기서 그렇게 매일을 멋지게 달려 보자.


아빠는 요즘 제대로 ‘쉰생아’가 되어 새벽마다 발코니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가지고 더 잘 놀고 있거든. 그 시간만큼은 나만 알고 있는 ‘비밀 서버’에 접속하는 기분이야.


모두가 잠든 사이, 세상을 독차지한 아이처럼 마음껏 뛰어노는 시간이지. 숲 속에서 골목과 얼음판을 지나 오래 흘러 온 아빠의 놀이터가 이제는 우리 집 발코니로 옮겨진 것뿐이야.


새벽마다 평소의 아빠 같지 않은 ‘다른 어떤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고상한 것, 더 위험스러운 것’까지 뭐든 상상하면서 내가 오로지 주인이 될 수 있는 시간이 되고 있어.


아빠가 새벽에 발코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주변의 모든 공간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려! 그 문을 열면 과거 숲속 본부에도 닿을 것 같고 골목길도 만날 것 같고, 얼음위에서 다시 뒹굴수도 있을 것 같아. 13층에 떠 있는 아빠만의 신비한 비밀이 가득한 공중 정원은, 그래서 아빠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경계없는 자유의 놀이터가 되어 주고 있단다.


그렇게,

그때의 저녁은 지금, 성찬의 새벽이 되었고

그때의 숲 속은 지금, 자유의 발코니가 되었고

그때의 산길은 지금, 무한한 사유의 길이 되었고

그때의 별빛은 지금, 꿈을 그리는 금빛이 되었고

그때의 함성은 지금, 나와 삶을 쓰는 울림의 활자가 되었단다.


그때의 사명감이 아빠 존재의 굳건한 축으로 세워지고 있어. 금빛 옷을 입은 활자들이 한참 잠들어 있던 과거의 왕국 속 전사들을 깨우면서 말이야. 그러곤 아빠에게 신비한 비밀을 알려줬지.


‘놀이’란 말이야.


규칙은 강제가 아니라 자율이다.

피곤해도 감각은 꺼지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

끝날 때 반드시 더 놀고 싶어 속이 타들어 가는 갈증을 남겨야 한다.

그렇게 내게 가장 짜릿한 순간이어야 한다.


그러니 하니야, 아빠는 확신해.


‘놀이’는,


‘스스로의 규칙으로 시간과 공간을 주도하고 끝날 때는 늘 아쉬움이 길게 남는, 그래서 내게 가장 짜릿한 자유의 행위’ 여야 해.


따라서, ‘잘 논다’는 것은,

짜릿함을 느끼는 주체가 내가 되고,

자율적이지만 독립적인 규칙을 가지고,

피곤해도 몸에 새겨진 감각이 끝까지 켜져 있는 상태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자기 주도적 통제가 가능하며,

억지로 멈추어야 할 때는 매번 다시 이어가고 싶는 갈증이 일어나면서,

내면의 왕국을 건설하는 행위란다.


그러니까 놀이의 왕국을 지탱하는 다섯 기둥은 바로 주체, 규칙, 감각, 통제, 갈증인 거야. 이 다섯 기둥이 내 안에서 단단하게 세워질 때 진짜 자기만의 놀이이고, 그 결과 ‘노는 근육’은 끊임없이 단련되는 것이지.


주체: 내가 진짜 주인공이 되는 경험. 설명서를 보지 않고 프라 모델을 완성하려 몇 시간을 쏟아부은 너의 모습처럼 말이야.


규칙: 스스로 만드는 자유로운 룰. "골대는 벤치 다리 사이, 3골 먼저 넣는 팀이 이긴다"와 같이 자율적으로 만든 규칙은 놀이를 더 맛있게 해주는 양념이지.


감각: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느끼는 순간. 클라이밍을 할 때 손끝으로 미세한 홀드를 느끼는 것처럼 감각은 놀이를 단순한 추억이 아닌 생생한 경험으로 남기지.


통제: 놀이에 끌려가지 않는 자기 조절 능력. 힘들면 잠깐 벤치에 앉아 호흡을 고른 뒤 다시 뛰어드는 것처럼, 내 손에 쥔 리모컨인 셈이야.


갈증: 끝나도 다시 하고 싶은 깊은 아쉬움. "와, 드디어 끝났다"는 일, "아, 다시 하고 싶다"는 놀이라는 분명한 차이를 만드는 힘이지.




요즘 새벽마다 새로운 놀이에 빠져 지내다 숲 속에서, 골목에서, 얼음 위에서 뛰어놀던 아빠의 ‘어린 나’를 다시 만나고 있거든. 그렇게 다시 만난 ‘어린 나’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부모구나’ 하고.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 안에 함께 사는 ‘어린 나’를 데리고 있기 때문이지.

네가 어릴 때, 우리 넷이 함께 가꾸던 텃밭에서 아빠한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어. “아빠, 방울토마토랑 깻잎 심은 땅 옆에 ’ 노는 땅‘에는 뭘 심을 거야?” 하고.


돌아보면, 그때는 비어 있는 텃밭을 왜 너는 ’ 노는 땅‘이라고 말했을까 하고 여기지 못했어. 그런데 이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 ‘쉰생아’에게 새로운 사명이 생겼거든. 그 사명은 오로지 모든 게 너 덕분이란다.

아빠의 사명은 아빠의 ‘어린 나’가


매일 비밀 서버에 접속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

그 ‘어린 나’와 함께 ‘노는 근육’을 제대로 키워내는 것,

그 근육으로 세상의 난장 속에서 아빠만의 ‘노는 땅’을 넓게 일구는 것,

이 과정을 고스란히 너에게 제대로 남겨 주기 위해 꾸준하게 기록하는 것!


이제 아빠가 네가 묻고 싶어.

너는 지금

너의 난장에서 어떤 ‘노는 땅’을 발견했니?


거기에

직접, 무얼 심을 거니?



https://blog.naver.com/ji_dam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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