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네가 아빠에게 붙여준 별명들 있지? ‘엄근진’, ‘진지충’, 쉰생아. 들을 때마다 피식 웃음이 난다. 맞아, 다 맞는 말이야.
아빠는 자주 엄숙했고, 더 자주 진지 했지. 늘 뭔가 의미 있는 걸 남겨야 한다는 강박, 남들에게 흠잡힐 데 없어야 한다는 병적인 집착, 남들과는 다르다는 교만한 착각에 빠져 지내느라 웃음이 줄어든 사람이었거든.
그런데 신기한 건 말이야.
‘쉰생아’
특히 이 별명이 요즘 좋다는 거야. 쉰이 넘으면서 다시 태어난 아기처럼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사람?! 그게 요즘 아빠의 마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 같아.
아빠가 출간 준비하는 거 알지? 그래. 글벗들과 자녀에게 남길 ‘정신의 유산’에 대해 함께 고민하며 글을 쓰고 있어. 각자 자신이 유산으로 남길 키워드를 하나, 둘씩 선택해서 말이야.
그런데 아빠가 선택한 키워드가 ‘놀이’야.
아니, 선택했다기 보다 그냥 아빠안에서 쏟아져 나왔어.
너무 당황스러웠지.
‘놀이’라니,
진지충 아빠의 입에서 튀어나올 만한 단어는 아니잖아.
아빠 안에서 쏟아져나온 ‘놀이’라는 단어 하나 붙잡고 수십번 쓰고 고치기를 반복하면서 이 편지를 써내려가고 있지만 술술 써지지는 않아. 하지만 무엇보다 아빠 스스로에게 되묻기 시작했어.
왜 하필 놀이일까?
내게 놀이는 어떤 의미일까?
나는 정말 놀 줄 아는 사람인가?
묻고 또 물었어.
그러다 어느날 새벽,
아빠도 한때는 에머슨이 말한 ‘천재’였다는 걸 깨달았단다. 언제나 오늘도 기똥차게 놀거라는 생각을 굳게 믿고, 늘 그렇게 놀았던 거야. 게다가 놀때마다 내가 믿는 대로 친구들도 함께 놀아줄거라 여겼고 실제로 믿음대로 그렇게 놀았던 날들이 훨씬 더 많았거든.
숲속에는 우리만의 ‘본부’가 있었어. 동네 뒷산 큰 바위옆에 나무를 주워서 벽처럼 만들고 쌀포대를 문처럼 내리 걸었지. 펄럭이던 그 쌀포대를 열고 숲속으로 나서기만 하면 어떤 세상으로도 다 갈 수 있을 것만 같았지. 또 다른 놀이터는 골목이었어. 비석치기,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숨바꼭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매일 비슷한 놀이였지만, 매일 새롭고 신났었지.
영하로 떨어지는 겨울이라고 아빠의 놀이는 멈추지 않았지. 아니 오히려 더 뜨거웠어.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했던 꽁꽁 얼어 붙은 개울위에 얼음배를 만들어 둥둥 떠다니며 해적 놀이도 했거든. 무엇보다 얼음판 위에서 쓰러질 듯 위태 위태한 팽이를 살려냈을 때는 심장이 터질듯한 희열에 함성이 터져 나왔어. 가슴이 웅장해졌어.
그 시절 아빠에게는 사명이 있었거든.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 우주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 그렇게 아빠의 ‘본부’는 세상을 지키는 왕국이었고, 우주를 구하는 사령부였지. 아빠는 여름에는 숲속 세상을, 겨울에는 얼음 왕국을 지키는 전사였고, 우주 사령부의 영웅이었던 거야.
물론 전사도, 영웅도 “밥 먹어라!”하는 할머니의 한마디 외침에 그날의 게임은 오버였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그 짧은 길은 늘 타는 듯한 갈증같은 짜증이 가득했단다. 그래도 그날의 놀이 성과들을 신발장 옆에 수북하게 쌓아 두는 것만으로도 그 짜증은 금새 가라 앉았지. 꿈속에서도 딱지를 치고, 구슬을 튕기고, 무궁화 꽃을 피울 수가 있었거든.
맞아. 그때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놀 때 가장 반짝거려. 그런데 그게 단순히 어려서가 아니야. 타고난 ‘노는 근육’을 매일 쓰니까 매일 단련돼. 그러고 보면 그때의 아빠도 ‘노는 근육’을 마음껏 썼던 아이였던 거야.
놀이의 다섯 기둥
이제 제대로 ‘쉰생아’가 된 아빠는 새벽마다 발코니에 앉아 책을 읽고 글을 가지고 놀아. 그 시간 만큼은 나만 알고 있는 ‘비밀 서버’에 접속하는 기분이야. 모두가 잠든
사이, 세상을 독차지한 아이처럼 마음껏 뛰어노는 시간이지.
숲속에서 골목과 얼음판을 지나 오래 흘러 온 아빠의 놀이터가 이제는 우리집 발코니로 옮겨진 것 뿐이야. 새벽마다 평소의 아빠 같지 않은 ‘다른 어떤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고상한 것, 더 위험스러운 것’까지 뭐든 상상하면서 내가 오로지 주인이 될 수 있는 시간이 되고 있어.
아빠가 새벽에 발코니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주변의 모든 공간은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려! 그 문을 열면 과거 숲속 본부에도 닿을 것 같고 골목길도 만날 것 같고, 얼음위에서 다시 뒹굴수도 있을 것 같아. 13층에 떠 있는 아빠만의 신비한 비밀이 가득한 공중 정원같은 이곳은 아빠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경계없는 자유의 놀이터가 되어 주고 있단다. 그렇게,
그때의 저녁은 지금, 성찬의 새벽이 되었고
그때의 숲속은 지금, 자유의 발코니가 되었고
그때의 산길은 지금, 무한한 사유의 길이 되었고
그때의 별빛은 지금, 꿈을 그리는 금빛이 되었고
그때의 함성은 지금, 나와 삶을 쓰는 울림의 활자가 되었단다.
그때의 사명감이 아빠 존재의 굳건한 축으로 세워지고 있어. 금빛 옷을 입은 활자들이 한참 잠들어 있던 과거의 왕국 속 전사들을 깨우면서 말이야. 그리곤 아빠에게 신비한 비밀을 알려줬지. ‘놀이’란 말이야.
규칙은 강제가 아니라 자율이다.
피곤해도 감각은 꺼지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다.
끝날 때 반드시 더 놀고 싶어 속이 타들어 가는 갈증을 남겨야 한다.
그렇게 내게 가장 짜릿한 순간이어야 한다.
그러니 아이야, 아빠는 확신해. ‘놀이’는,
‘스스로의 규칙으로 시간과 공간을 주도하고 끝날때는 늘 아쉬움이 길게 남는, 그래서 내게 가장 짜릿한 자유의 행위’여야 해.
따라서, ‘잘 논다’는 것은,
짜릿함을 느끼는 주체가 내가 되고,
자율적이지만 독립적인 규칙을 가지고,
피곤해도 몸에 새겨진 감각이 끝까지 켜져 있는 상태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주변 환경에 대한 자기 주도적 통제가 가능하며,
억지로 멈추어야 할 때는 매번 다시 이어가고 싶는 갈증이 일어나면서,
내면의 왕국을 건설하는 행위란다.
그러니까 놀이의 왕국을 지탱하는 다섯 기둥은 바로 주체, 규칙, 감각, 통제, 갈증인거야. 이 다섯 기둥이 내 안에서 단단하게 세워질 때 진짜 자기만의 놀이이고, 그 결과 ‘노는 근육’은 끊임없이 단련되는 것이야.
그럼, 이 다섯 기둥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볼게.
주체
놀이라는 배를 탄 이상 노만 젓는 선원이 아니라 직접 키를 잡고 목적지를 정하는 선장이 되어 보는 경험이야. 단순히 ‘내가 한다’가 아니라, ‘나로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창조한다는 의미지. 설명서를 보지 않고 프라 모델을 완성하려 몇 시간을 쏟아부어 결국 완성했던 너의 모습처럼 말이야.
규칙
놀이라는 덩굴 식물이 가장 건강하고 창의적으로 질서 정연하게 무력무력 자랄 수 있도록 돕는 격자 울타리와 같은 것이지. 맨 땅위에 선 하나 굿는 것만으로도 왕국을 세울수 있는 것처럼. ‘골대는 벤치 다리 사이, 3골 먼저 넣는 팀이 이긴다’와 같이 자율적으로 만든 규칙은 놀이를 더 맛있게 해주는 양념인 것이잖아.
감각
네가 노는 장면을 찍어 둔 흑백 사진을 상상해 봐. 언제든 다시 현상만 하면 그 순간의 감촉과 온도, 심지어는 냄새와 소리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하지. 이유는 오감이 기억하기 때문이지. 클라이밍을 할 때 손끝으로 미세한 홀드를 느끼는 것처럼 감각은 놀이를 단순한 추억이 아닌,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생생한 경험으로 만드는 힘이지.
통제
놀이에서의 통제란 무언가를 억누르는 것, 즉 거대한 힘을 막아서는 게 아니라, 그 힘의 흐름과 하나 되어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을 의미해. 마치 파도타기를 하는 서퍼가 능숙하다는 것은 파도가 아니라 자신의 보드와 몸의 균형을 완벽하게 통제함으로써 파도와 하나가 되는 것처럼. 통제는 자기 능력을,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인 것이지.
갈증
빠져 든 드라마를 생각해 봐. ‘모든 비밀이 풀렸다’는 완결성이 아니라, ‘과연 다음엔 어떻게 될까?’라는 즐거운 궁금증이 화면 잔상처럼 남아 있지. 제대로 놀다 끝난 놀이도 그래. 마음에 다음 편에 대한 강렬한 예고편을 남기는 것이지. ‘와, 드디어 끝났다’는 일, ‘아, 벌써 끝났어?’는 놀이라는 분명한 차이를 만드는 힘이지.
어른의 놀이터
요즘 새벽마다 새로운 놀이에 빠져 지내다 숲속에서, 골목에서, 얼음위에서 뛰어 놀던 아빠의 ‘어린 나’를 다시 만나고 있는데. 그렇게 다시 만난 ‘어린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부모구나’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 안에 ‘어린 나’를 데리고 살고 있기 때문이지. 다만, 어린 부모와 나이 든 부모로 나뉠 뿐이더구나. 그러면서 잊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었어.
인간은 예전부터 ‘무엇을 먹을까’만큼이나 ‘오늘은 뭘 하며 놀까’를 고민해 온 존재였다는 것을. 어쩌면 그건, 아이에서 자라온 우리가 태어나면서 지니고 있던 ‘노는 근육’을 계속 키우려는 본능적인 시도인지도 몰라.
새벽에 책 읽고 글 쓰며 놀다 보면, 놀이가 생존을 유지한 뒤에 따라오는 여분의 활동이 아니라는 게 느껴지거든. 호이징아가 말한 것처럼, ‘놀이가 문화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어.
그런데 어른이 되면 사정이 달라져. 책임과 역할, 의무만 쏟아지는 자리에 계속 던져지다 보니, 자연스레 놀이터를 잃어버렸다거나 잊게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지. 그러면서 ‘노는 근육’이 점점 녹아내려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놀 시간이 없다고, 방법을 모른다고,
이제는 못 놀겠다고 노는 대신 쉬려고만 하지. 그렇게 스스로를 어른이라는 핑계로 일에만 가두게 돼. 아빠는 그것을 이렇게 부르려 해.
난장(亂場)
물건과 삶이 뒤엉키는 시장,
도전과 실패, 변수로 가득 찬 시험장,
수많은 목소리와 몸짓이 부딪히는 광장,
경쟁과 협력이 동시에 벌어지는 운동장,
규칙 속에서도 혼돈이 터져 나오는 경기장,
질서와 무질서가 줄 지어 세워져 있는 주차장,
몸과 마음이 단련되면서도 늘 예측불가한 훈련장,
.....
맞아. ‘아이’를 벗어난 이후 우리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모두 난장이야. 이 말은, ‘어른’이 된 우리는 새로운 놀이터를 이 난장안에서 찾아야 된다는 의미지.
그런데, 가끔, 그 난장에서 ‘노는 근육’이 퇴화되다시피한 우리는 난장에서의 공허함과 피로를 달래기 위해 ‘쉼’이라는 이름의 마취제를 찾는다. 멍하니 TV를 보거나, 의미 없이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는 행위를 ‘휴식’이라고 여기면서 말이지. 사실 그것은 잘 놀고 있다고 착각하는, ‘정신의 방치’에 가까워.
쉼이 육체의 피로를 잠시 잊게 할지는 몰라도, 영혼의 허기를 채워주니는 못하니까. 아니, 오히려 더 깊은 공허와 무력감만 남길 뿐이지. 벼르던 여행을 다녀와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계속 가슴 한 켠을 맴도는 것처럼 말이야. 오히려 뒤집어서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난장이야말로 어른의 새로운 놀이터가 될 수 있다고.
우리의 삶의 실체는 불편하지만 그속에서 만들어지잖아. 먹기 위해, 보기 위해, 만나기 위해, 얻기 위해, 키우기 위해, 달리기 위해, 통과하기 위해, 멈추기 위해, 배우기 위해서 말이야
놀이 천재들
그런데 아이야.
바로 여기에 거대한 반전이 숨어 있단다. 우리가 도망치고 싶어 하는 그 난장이야말로, 어른에게 허락된 유일하고도 가장 장엄한 놀이터라는 사실 말이다. 이건 이미 네 주변에 있는 이들이 증명하고 있는 엄연한 진실이야.
오늘 만난 이들을 순서대로 떠올려 봐. 분명, 이런 난장에서도 즐기며 노는 인간들이 있거든!. ‘어린 ’가 선천적으로 지닌 ‘노는 근육’을 짱짱하게 단련한 놀이 천재들이 난장마다 존재해. 무조건 있다니까,
멀리 가지 말고, 아빠를 봐줄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아빠도 놀이 천재라고 했었지? 어릴 때 숲속 본부에 매달려 있던 쌀포대가 지금의 발코니 문 손잡이가 되었을 뿐이지 분명, 그때도 난장이었지만 놀았었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놀았었어.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돈이 많아서?
시간이 많아서?
친구가 많아서?
아니야. 어느 때고 이 세가지는 늘 풍족하지는 않았어. 무엇보다 이것들이 넘쳐난다고 제대로 놀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니 걱정마. 난장에서도, 숲속과 골목, 얼음판위에서처럼 제대로 놀 수 있는 조건은 이것들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거든. 중요한 건 앞에서 말한 놀이의 5가지 조건이 자신의 난장안에서 충족되고 있는가, 이게 포인트란다.
주체, 규칙, 감각, 통제, 갈증
나의 하루에는 이 다섯가지가 있나? 나한테는 뭐가, 얼마나 있지에 대해 스스로 어느 정도로 대답을 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 그 ‘정도’와 ‘강도’가 내 삶의 놀이에 있어 양적, 질적 가치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지. 그걸 알아보기 위해서는 다시, 이 다섯가지가 어느 순간, 어떻게 작동되었는지를 되짚어 보면 된단다.
그때, 주체가 누구였는지
그 순간, 자기만의 규칙이 적용되었는지
그러는 동안, 동물적인 감각은 늘 살아 있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제 시간에 깨우고 제 곳에 다시 세웠는 지
행동의 끝에서, 진한 갈증을 느껴 다시 하고 싶다는 마음을 다졌는 지!
노는 근육 단련법
아이야,
앞에서 말한 놀이의 다섯 기둥을 이미 가지고 있다면 너는 네 안의 ‘어린 나’를 여전히 데리고 잘 놀고 있는 것이란다. 본능적으로 타고난 ‘노는 근육’을 잘 단련하고 있는 것이지. 하지만 없다면? 걱정할 게 뭐 있겠어. 근력 운동을 시작하면 되지. 내 안에 있는 아이의 ‘노는 근육’을 다시 단련해 보는 거야. 아빠가 방법을 알려줄께.
>‘실패’를 ‘실험’으로 재정의 해보기
아주 오래 전. 아빠가 난생 처음 100명 가까운 교사들 앞에서 발표를 했을 때, 준비한 자료가 먹통이 되어 아주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어. 머릿속도 멈춘 듯 했지. 하지만 순간, 주제를 ‘성공 사례’에서 ‘실패 사례’로 바꾸어 이야기해야겠다 했지.
실패담은 화면 없이도 술술 흘러 나왔거든. 그렇게 오히려 큰 공감을 얻었고, 발표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어. 그 경험은 아빠가 전국 강연과 대학 강의를 다니는 삶의 출발점이 되었고, 실패를 기록하고 돌아보는 태도는 지금껏 아빠의 삶을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기술이 되었단다.
이 놀이는 ‘주체’와 ‘통제’ 근육을 단련시켜.
>‘문제’를 ‘미션’으로 바꾸기 보기
너 어릴적 한참 빠져 있던 놀이가 뭐니? 아빤 너와 함께 했던 팽이 놀이가 기억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어. 맞아. 탑블레이드. 너와 그 놀이를 하면서 아빠의 어릴적 얼음판 위의 팽이를 새삼 떠올렸었거든.
그때, 넌 해결해야 할 수많은 ‘문제’를 너만의 ‘미션’으로 전환한 거였어. 가장 강력한 메탈 블레이드 팽이 조합을 찾아내려고 말이지, 마침내 가장 강력한 팽이를 완성했을 때 너의 눈빛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자신감으로 넘쳐 났었어.
이를 통해 ‘규칙’과 ‘갈증’ 근육을 강화할 수 있어.
>'타인의 시선'을 '관객'으로 바꾸기
어느 해인가 아빠 수업에 홍조증 때문에 발표를 포기한 아이가 있었어. 하지만 체육대회 이어달리기에서 그 아이는 3등으로 달리다 결승선을 두 번째로 힘차게 통과했고, 환희로 가득 찬 얼굴로 친구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었어. 그 모습은 마치 세상을 향해 “이건 내가 즐기는 무대야”라고 외치는 듯했지.
그날, 그 아이에게 타인의 시선은 평가가 아니라 환호와 감동의 관객이 되었어. 우리는 흔히 시선을 냉정한 잣대로만 보지만, 내가 세상이라는 무대를 즐길 때 그 세상은 기꺼이 가장 열렬한 관객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그 아이를 통해 다시금 깨닫게 되었단다.
이 놀이는 ‘주체’와 ‘감각’을 단련하지.
근원적 경쟁력
여기까지 아빠가 이야기한 건 결국 ‘놀이’라는 단어에 담긴 힘에 관한 거야. 숲속 본부에서 뛰놀던 어린 날의 추억, 골목의 열기, 얼음판 위에서의 아슬아슬한 순간들, 그리고 지금 발코니에서 이어지는 사유의 시간까지. 이 모든 건 아빠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노는 근육’을 단련하는 순간들이었지.
그러는 동안 놀이의 다섯 가지 조건—주체, 규칙, 감각, 통제, 갈증—은 난장 같은 일상을 헤쳐 나가게 하는 삶의 원리로 작동했지. 결국, 잘 논다는 건 단순한 유희가 아니라, 삶을 끝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치열한 태도라는 걸 알게 된 거야.
그런데 아빠 어릴적과 지금 이 시대는 본질적으로 너무 달라졌어. 어릴 적 숲속 본부나 골목, 반질한 얼음판과 같은 단순하고 분명한 시공간이 아니야. 어른이 된 후 만난 난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디지털 공간까지 확장되었거든. 특히 AI라는 거대한 기술이 일상에 깊숙이 자리잡고 우리의 생각과 선택, 그리고 미래까지 흔들고 있어.
맞아. 지금은 AI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AI는 이미 우리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보다 10년, 아니 50년 뒤 어떤 기술이 나올까? 당연히는 아무도 모르지. 그걸 가르쳐 줄 수 있는 학교도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고.
그런데 ‘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왜 갑자기 AI를 말하나 싶을 거야. 이유는 간단해.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의 ‘정신’은 대신할 수 없다는 거야. 그렇기 때문에 AI는 몸으로 부딪히고 호기심으로 시도하는 놀이를 할 수 없지. 그래서 ‘잘 논다는 것’은 AI와 공존하는 인간만의 경쟁력이 되는 것이야. 이 말은 AI가 아니라 그 어떤 첨단 기술이 개발된다고 하더라도, 너의 경쟁력은 ‘놀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란다.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은 ‘잘 놀다 가는 것’’이라고 말한 장자나, ‘인간은 노는 존재’’라고 말한 하위징아의 말처럼 잘 논다는 것은 무질서한 삶 속에서 자신만의 질서를 유쾌하게 유지하는 정신적 상태를 의미해. 실패를 실험으로, 문제를 미션으로, 시선을 관객으로 바꾸는 창조적 해석력으로 맑아진 정신을 말이지.
그 힘을 믿고 삶의 혼란스러운 '난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거꾸로 ‘장난’으로 바꿔 봐. 난장에서 장난으로 옮겨가는 순간, 삶은 다시 너의 편이 될 수 있어. 이는 두려움 대신 놀이로 삶을 맞이하는 방식이고, 난장을 견뎌내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꽃을 피우는 힘이 된단다.
그런데, 단순히 나이를 먹는 것만으로는 진정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없거든.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있던 ‘노는 근육’을 다시 키우고, 삶의 무대에서 더 깊고 지혜로운 방식으로 놀이를 계속해 나가는 삶의 태도를 가져야 어른다운 어른,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이란다.
그러니 이렇게 기억하자.
삶이 네게 난장을 던지거든,
너는 그것을 장난으로 받아쳐라,
그렇게 장난을 이어가면 놀이로 승화되고,
놀이를 창조적으로 풀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해지며,
성숙을 계속 유지하면 네 존재만으로도 난장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외면하는 값싼 긍정이 아니란다. 삶의 실체인 혼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것을 나의 무대로 만들겠다는 창조적 반항이란다.
네가 어릴 때, 우리 넷이 함께 가꾸던 텃밭에서 아빠한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어.
“아빠, 방울 토마토랑 깻잎 심은 땅 옆, ’노는 땅‘에는 뭘 심을 거야?”
돌아 보면 그때는 네가, 비어 있는 텃밭을 왜 ’노는 땅‘이라고 말했는지 신경쓰지 않았었어. 그런데 이제는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단다. ‘쉰생아’에게 새로운 사명이 생긴 덕분이지. 물론 그 사명은 오로지 모든 게 너 덕분에 얻은 것이고.
아빠의 사명은 아빠의 ‘어린 나’가
매일 비밀 서버에 접속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
그 ‘어린 나’와 함께 ‘노는 근육’을 제대로 키워내는 것,
그 근육으로 세상의 난장속에서 아빠만의 ‘노는 땅’을 넓게 일구는 것,
이 과정을 고스란히 너에게 제대로 남겨 주기 위해 꾸준하게 기록하는 것!
이제 아빠가 네가 묻고 싶어.
너는 지금
너의 난장에서 어떤 ‘노는 땅’을 발견했니?
거기에
직접, 무얼 심을꺼니?
https://blog.naver.com/ji_dam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