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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의 재미를 즐기는 사람들

[ 아빠의 유산 ] 44

by 정원에

아빠는 인생의 재미도 건강을 위해, 일을 위해, 삶을 위해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해.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뭐 먹을까?”라고 말할 때 감정이 떨리는 이유는 단지 신체의 포만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깊게 음미하고 싶어서가 아닐까?



‘인생은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와 같다.’




이런! 무시무시하지? 조금 허탈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는 ‘결핍’으로 인한 고통을 느끼고, 막상 그것을 이루고 나면 금세 무료함, 즉 ‘권태’에 빠진다는 뜻이지. 이건 우리의 미각도 비슷하단다. 배가 고플 때는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느껴지지만, 배가 채워지고 나면 아무리 진수성찬이라도 감흥이 없어지지.


그럼, 어차피 고통 아니면 권태가 인생이라면, 굳이 힘들여 살 필요 있나? 애쓸 필요 있나? 한번이라도 재미나게 살아 볼수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밀려 나올지도 몰라.


하지만, 당연히 삶이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우린 잘 알고 있어. 나의 인생이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수가 없잖아. 그러면 안 되잖아. 그래서, 이 새벽에 아빠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이고 말이야. 지금부터 쇼펜하우어가 말한 위 문장을 하나하나 해체해 볼게!


인생은 인간이 살아가는 총체적 ‘경험의 시간’이고,

고통은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의 부정적 정서이고,

권태는 욕망이 충족된 후 더 이상 의미를 차지 못한 공허이고,

시계추는 고정된 채 길게 늘어져 좌우로 움직이는 진자 운동이다.


우선, 인생이란 시간 속에서 고통과 권태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은 일단 인정해. 어느 정도 사실이거든. 이 말은 인생의 시공간에서 우리는 항상 풍족하지도, 성공할 수도, 완벽한 행복감을 느끼며 살수도 없다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요즘 아빠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봐.


“좋아. ‘인생이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라고 하자! 그렇다면, ’고통‘도 ’권태‘도 아닌, ’과‘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즉, 이 사이에는 뭐가 있지 않을까?”


무슨 말이냐고? 아빠 질문의 핵심은 아주 선명해. 다음을 잘 봐봐.


고통 <--------------------------------> 권태


괘종시계의 시계추를 한번 상상해 봐.

시계추는 늘 한쪽 끝으로만 머무르지 않아. 왼쪽 끝에 다다르면, 다시 오른쪽 끝을 향해 움직여. 여기서 중요한 건 “양극성”이야. 인간의 삶은 언제나 서로 반대되는 두 힘이 긴장을 이루며 균형을 만들어. 밤과 낮, 기쁨과 슬픔, 시작과 끝처럼 말이지.


사실, 고통과 권태가 서로의 극단은 아니야. 고통은 쾌락과, 권태는 활력과 양극단에 위치하니까. 그런데 실제 삶의 경험에서 우리는 쾌락이 지속되면 금세 권태로 이어지고, 권태가 깊어지면 고통이 느껴지기 시작하지.


즉, 쾌락과 활력이 사라진 뒤 남는 “텅 빈 상태”에서 고통과 권태가 서로 맞닿아 하나의 진자 운동을 이루는 것이지. 그래서 인생의 시계추는 결과적으로 고통과 권태 사이를 왕복하는 듯 보이는 거지.


하지만 우리가 눈여겨볼 건 바로 앞에서 아빠 스스로 던진 질문이란다.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길목”말이야. 시계추의 핵심은 극단이 아니라 ‘운동’이거든. 시계추가 멈춰 극단에만 박혀 있다면 시계는 더 이상 시간을 새기지 못해. 반대로 끊임없이 흔들리며 양쪽을 이어줄 때 비로소 시간이 흘러가고, 시계가 제 역할을 하게 되지.


인생도 그래. 고통과 권태라는 양극을 오가며, 그 사이 구간에서 우리는 배우고, 성장하고, 의미를 만들어. 결국 중요한 건 고통 그 자체도, 권태 그 자체도 아니야. 바로 구간, 즉 우리의 인생에서 고통과 권태를 잇는 수많은 “사이를 살아내는 방식”이 인생의 정신이라는 거지. 너와 나누고 싶은 삶의 ‘재미’는 그 ‘사이 구간’에 존재하는 것이거든!


그런 의미에서 시계추는 단지 ‘시간의 기계적 반복’, 즉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지점에 대한 은유일 뿐이지. 결국, 인간의 삶은 선형적 나열이 아니라 비선형적 왕복과 회전이고, 직선이 아니라 곡선, 단면이 아니라 다면, 평면이 아니라 입체야. 그 안에서는 많은 감정들이 오가지. 우리가 찾으려 하는 재미는 바로 그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이란다.


맛으로서의 재미라는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미식가가 있단다. 하나는 비싸고 화려한 음식만을 찾아다니는 미식가, 다른 하나는 평범한 식재료에서도 고유의 맛과 향을 발견해 내는 진짜 미식가. 인생의 재미를 아는 사람은 후자에 가까워. 그들은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도 주변의 작은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아내는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거든.


너 주변을 한번 돌아봐. 분명히 있어, 그런 미식가가. ‘기계적 반복’이라는 나열에서 고통과 권태를 예술, 철학으로 승화시키고, 자기만의 ‘리듬’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특별히 더 많은 돈이 있거나, 더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 것도 아닌데, 왠지 삶을 마음껏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그렇다면 그들이 지닌 능력의 원천은 대체 무엇일까? 그 비밀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적인 ‘태도’에 있단다. 평범한 재료에서 특별한 맛을 찾아내는 미식가처럼, 그들은 일상이라는 재료를 다루는 자신만의 ‘마음의 레시피’를 가지고 있는 셈이지. 아빠는 그 레시피의 핵심을 바로 ‘명랑함’이라고 단정해.


명랑함에 대해서는 여러 철학자가 그 뜻을 함께 하고 있단다.

괴테는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에서 시종일관 태도를 바꾸지 않고, 매일 부지런히 노력하는 할 수 있는 하나의 샘을 ‘명랑한 감정’이라고 표현했고,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랄프 왈도 애머슨을 언급하면서 그가 ‘모든 심각성을 꺾어버리는 선량하고 재치 있는 명랑함’을 지니고 있다고 칭송했어.


쇼펜하우어는 <쇼펜하우어 인생론>에서 쇼펜하우어는 이 태도를 ‘명랑한 마음(Heiterkeit)’이라고 불렀단다. ‘명랑한 마음은 어떤 외적 조건보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든다.’라고 설명하면서 말이야.


철학자 김진영이 암투병 마지막날까지 쓴 일기 <아침의 피아노>에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야채 장수’를 보면 아빠가 이야기하는 ‘명랑함’이 살아 넘친단다.


‘트럭에서 야채를 산다. 왜 이렇게 비싸요. 며칠 전엔 1000원 밖에 안 했는데 여자가 꽈리고추 봉지를 들고 불평하니까 야채 장수는 껄껄 웃으며 대답한다. 예쁘게 생겼잖아요. 사람이나 물건이나 예쁘면 비싼 거예요. 아침마다 아파트 앞에 트럭을 세우는 이 남자는 방금 떼어 온 야채들처럼 늘 싱싱하다. 그의 목소리가 크지만 시끄럽지 않다. 오히려 듣는 사람의 배 속으로 들어가서 근심을 쫓아내고 마음을 비워준다. 그건 분명 그의 목청을 통해서 밖으로 나오는 생의 명랑성 때문이다. 정신이 깊고 고요한 것만은 아니다(그것이 나의 오랜 착각이었다). 정신은 우렁찬 것이기도 하다. 우렁찬 정신은 야채 장수처럼 목청으로 제 존재 를 보여준다. 그 목청의 정신을 배울 때다.’


이처럼, 명랑한 마음은 똑같은 상황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실패 속에서도 배움을 찾아내는 힘이야. 그 힘을 연료로 쓰는 게 바로 '재미'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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