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 어둠이 깊은 하늘을 향해 높다랗게 뻗어 있는 아파트 층층마다 보일러가 뿜어내는 연기가 새하얀 입김처럼 모락모락한다.
겨울철 시골집에서 봤던 굴뚝처럼 하늘로 뻗어 오르지는 못하지만, 높다랗지는 못하지만 여전히 생명이 느껴진다.
그러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다 결국 허공으로 흩어지는 그 연약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또 다른 ‘연기(緣起)’가 떠오른다.
한자로는 다르지만 소리가 같은 이 두 단어는, 놀랍게도 “나라는 존재는 혼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하나의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굴뚝의 연기를 가만히 들여다 본다. 저 연기는 혼자 힘으로 저곳에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다. 연기가 피어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땔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태울 불씨가 있어야 하며, 연기가 빠져나갈 굴뚝이라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심지어 그날의 바람과 공기의 흐름이 있어야 비로소 우리가 보는 ‘낭만의 연기’가 된다. 만약 땔감이 젖어 있었다면 연기는 매웠을 것이고, 바람이 거셌다면 연기는 나오자마자 흩어졌을 거다.
굴뚝의 연기는 오래, 잘 말려 준비해 둔 땔감 덕분에, 제대로 붙은 불씨 덕분에, 굴뚝 덕분에, 바람 덕분에 빚어낸 결과물일 뿐,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다.
나를 만든 것은 ‘오로지 나’일까?
연기(緣起)도 이와 똑같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말은 다소 어렵게 들리지만, 삶에 대입해보면 아주 명쾌한 ‘관계의 원리’가 된다.
흔히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미래의 나’를 내가 주도적으로 만들었다고 착각한다. 내 노력으로 대학에 갔고, 내 실수로 일을 망쳤으며, 내 의지로 밥을 먹었다고 생각하듯. 하지만 굴뚝 연기처럼, 나라는 존재는 수많은 타인과 환경이 빚어낸 합작품이다.
스산한 새벽 밭마다 양배추를 키운 농부,
냄새나는 닭장에서 동거동락했을 주인장,
어둠을, 빗속을, 뜨거운 열기속을 달렸을 기사,
이 재료들을 자르고, 다듬고, 포장한 수많은 일꾼들,
매장 진열대에 차곡 차곡 잘 정리해 둔 마트 직원들,
그리고 떨어지지 전에 주문해 냉장고에 쟁여두는 아내.
이 모든 이들이 없었다면, 자기 역할을 하지 않았다면 오늘 점심에 먹은 닭가슴살 샐러드는 나를 또 한번 살리지는 못했을 거다.
나의 ‘본질’은 어떤가? 부모님의 양육 방식, 어린 시절 친구와의 다툼, 학창 시절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 내 세포가 자라면서 뛰어다녔던 들과 산의 습도와 바람, 햇살과 어둠이 겹겹이 쌓여 지금의 내 말투와 생각, 성격과 가치관이 만들어 진게 분명하다.
결국, ‘오로지 내가 만든 나’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이 있었기에 존재하고, 당신은 내가 있었기에 존재한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인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지고 동시에 자유로워진다. 내가 잘나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도움, 운, 시대적 상황, 자연적, 인문적 환경)이 나를 밀어올려 준 덕분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내가 실패했더라도 그것이 온전히 나의 부족함 탓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날의 바람(상황)이 좋지 않았거나, 땔감(환경)이 젖어 있었을 뿐이니까.
굴뚝에서 나온 연기는 하늘로 흩어져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다시 땅을 적신다. 그 물은 나무를 키우고, 그 나무는 다시 누군가의 굴뚝에서 또 다시 연기가 된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 내가 오늘 무심코 건넨 친절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하루를 살리고, 그 누군가가 훗날 미래의 나를 도울 수도 있다. 나의 행동이 타인에게 흘러가고, 타인의 영향이 다시 나에게로 스며든다.
우리는 독립된 섬이 아니라, 서로 기대어 흐르는 물결이다. 오늘 하루,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보듯 나의 주변을 물끄러미, 차분히 바라본다.
지금 내 곁에 있는 동료, 가족,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그들 모두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소중한 ‘필요 충분 조건’들이다.
“어제의 나도, 오늘의 나도, 미래의 나도 결코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연기가 되어 밴다. 이 사실을 잊지 말자 다짐한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삶을 짓고 있는 굴뚝 수집가들인 거다. 이 다짐 덕분에 나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는 것을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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