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본래 밖에서 입고 있던 사회적 가면과 갑옷을 벗어놓는 ‘무장해제의 공간’이다.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충전 스테이션’은 집을 모델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집이 없으면 우리는 다시 세상에 나갈 에너지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집은 지나치게 ‘폐쇄적인 성(Castle)’이 되었다. 아. 파. 트.로 은유되는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 안에 숨어, 우리는 안전함을 얻었지만 동시에 철저히 고립되었다.
“내 집 마련”이라는 목표 아래, 집의 평수는 넓어졌지만 그 안에서 나누는 대화의 밀도는 낮아졌다. 집이 휴식처를 넘어 ‘단절의 벙커’가 되면서 우리는 타인의 인기척을 소음으로만 여기게 되었다.
골목은
집과 집이 마주하고 이어져 만들어지는 공간이다. 집을 ‘점’이라고 한다면 골목은 그 점들을 연결하는 ‘선’이다.
골목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통로가 아니라,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아이들이 뛰어노는 ‘삶의 거실’이다.
골목은 우리 몸의 모세 혈관 그리고 신경망과 같다. 피(사람)가 구석구석 돌아야 몸(마을)이 건강한데, 지금은 모세 혈관이 사라지고 거대한 동맥(대로, 복도, 엘리베이터)만 남았다.
효율성을 따지는 도시 계획 속에서 굽이진 골목은 직선의 복도와 엘리베이터로 대체되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웃과 눈을 마주치는 대신 층수 표시판만 바라본다.
‘우연한 마주침’이 사라진 사회, 이것이 바로 골목의 상실이 가져온 현대적 외로움의 본질이 아닐까.
집에만 갇히면 우울해지고, 골목에만 머물면 소진된다. 해결책은 이 둘 사이의 ‘건강한 순환’을 회복하는 것이다.
집의 두껍고 단단한 현관문은 외부를 차단하는 ‘벽’이기도 하지만, 소통을 조절하는 ‘밸브’여야 한다. 집은 안전해야 하지만,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진공 상태일 필요는 없다.
골목이 물리적으로 사라졌다면, 심리적인 골목을 만들어야 한다. 창문을 열어 바깥의 소리를 듣고, 현관문을 나설 때 마주치는 이웃에게 가벼운 목례를 건네는 것.
이것은 나의 안전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는 공간의 공기를 순환시키는 행위다. 가족처럼 끈끈할 필요는 없다.
그저 단골 카페 사장님과 날씨 이야기를 나누거나, 산책길에서 만난 강아지를 보며 웃어주는 것. 이런 ‘작은 마주침’들이 모여 삶의 윤활유가 된다.
새벽 운동길에 들어오다 자주 마주치는 16층 아저씨처럼,
퇴근길에 들르는 단골 카페의 구석 자리에 앉아 젊은 바리스타처럼,
같은 버스 같은 자리에 앉아 우연히 또 마주친 옆자리 익숙한 타인처럼,
햇볕 잘 드는 주말 오후. 도서관 창가 자리에서 청소하는 아르바이트생처럼,
'강아지 옷이 너무 예쁘네요'하며 늘 비슷한 시각에 산책시키는 강아지 주인처럼...
그곳에서 나를 적극적으로 아는 사람은 없지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진다. 먼저 눈인사를 건넬 수 있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초록색 나무가 많은 골목, 오래된 가게들이 늘어선 골목, 아이들 소리가 들리는 놀이터가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골목처럼 일부러 '돌아가고 싶은' 길 여기저기에 있다.
그래서 내게는 집이 삶의 쉼표(,)라면, 골목은 삶의 느낌표(!)다. 울림이 커 한참 머물고 싶은, 그럴 수밖에 없는 짧지만 강렬한 문장과 같다. 쉼표만 있는 문장은 지루하고, 느낌표만 있는 문장은 시끄럽다.
좋은 글이 쉼표와 문장 부호들이 적절히 어우러져야 읽히듯이, 좋은 삶 또한 ‘나를 지키는 집’과 ‘타인과 연결되는 골목’이 조화를 이룰 때 완성된다.
나의 집은 너무 굳게 닫혀 있지 않나?
나는 오늘 몇 개의 골목(마주침)을 지나왔을까?
진정한 안식은 닫힌 문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용기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포근함 사이에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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