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을 연주하는 법
[ 사유가 머문 자리 ] 13
○•_아슬아슬한 틈새에 대하여
인간은 태어날 때 맨발이었으나, 사회라는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갑갑한 입장화(靴)을 신어야 한다. ‘직함’이고, ‘체면’이며, 종종 ‘책임’이라 불리는 무거운 밑창을 달고 있는.
맨발로 자갈밭을 걷는 고행을 자처하지 않는 이상, 구두도, 작업화도, 운동화도 문명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피할 수 없는 피부의 연장이다.
처음 신었을 때의 고통이 사라지고 발에 완벽히 길들여졌을 때, 위험한 것은 그 편안함 자체가 아니다. 진짜 위기는 발이 신발의 모양대로 굳어버려, 자신이 원래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수 있는 존재였음을 망각하는 순간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마취제다.
그러나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다. 아무리 점잖은 신사숙녀라도 테이블 아래, 혹은 어둑한 극장 안, 덜컹거리는 기차 안에서 아무도 모르게 뒤꿈치를 들어 올려 신발과 발 사이에 은밀한 ‘틈’을 만든다는 사실이다.
식당에서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좌식 테이블을 선호하는 중년의 본능이나, 사무실 책상 아래서 슬리퍼로 갈아 신으며 느끼는 그 짜릿하고도 뭉근한 해방감을 보라. 그 순간 꼬릿한 냄새가 날지언정, 발가락은 비로소 숨을 쉰다. 이것은 사소한 습관이 아니라, 생존 본능의 존재론적 환기다.
그것들을 영원히 벗어던지고 야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며 때로는 무책임하다. 필요한 것은 ‘의식적 이격(離隔)’의 기술, 즉 꽉 묶인 끈과 발등 사이에 종이 한 장 들어갈 틈을 허락하는 정서적 여유다.
신발이 나를 신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필요에 의해 신발을 이용하고 있음을 기억하는 주인의식. 그것이야말로 문명 속 야만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우아함이다.
결국 삶이란, 발에 딱 맞는 편안한 신발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아니라, 어떤 신발을 신더라도 때때로 뒤꿈치를 들어 올릴 줄 아는 요령을 익히는 과정이다. 꽉 조인 현실의 매듭 속에서도 유머라는 깔창을 깔고, 사유라는 뒤트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구속되어 있으나 결코, 마비되지 않은 발로.
자유는 24시간 맨발로 사는 것에 있지 않다. 자유는 언제든 신발을 벗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인하고, 하루 중 단 몇 분이라도 의식적으로 발에게 바람을 쐬어주는 그 ‘틈’속에, 짧은 순간, 순간에 머문다. 그 순간, 중력을 없애려 무모한 도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중력 위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