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린의 고통
얼마 후, 인서는 자신을 무너뜨렸던 삶의 잔해 속에서 꺼져가던 작은 불씨 하나를 보았다.
그 불씨에 다시 바람을 불어 넣은 사람은 하린이었다.
하린은 인서 곁에서 그 불빛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며, 조용히 온 마음을 다해 인서를 일으켜 세웠다.
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인서는 먼저 자신을 일으켜 세웠다. 남편의 폭행 전과가 드러나면서, 더 이상 순순히 양육권을 그에게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이는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도, 어느 쪽에도 온전히 기대어 보호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아이는 임시 보호 처분을 받게 되었고, 그 순간 인서는 비로소 자신이 다시 서야 할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는 상담과 치료를 스스로 결정하며, 무너진 삶의 잔해 속에서 다시 살아보려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한편, 굳게 닫혀 있다고 믿었던 하린의 마음은 인서의 아픔을 지켜보는 동안 서서히 자신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다. 시온에 이어, 또다시 누군가의 상처를 보며 자신의 아픔을 마주한 하린. 시온 때와는 달리, 열리게 된 자신의 마음에 고통이 밀려오자 누군가의 마음과 마주하는 일이 조금씩 두려워졌다.
인서가 다시 일어서던 그 순간, 하린은 오히려 자신 안의 무너진 부분을 마주해야 했다. 그녀는 알았다. 마음을 연다는 것은 단순히 타인을 위로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까지 함께 드러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래서 아직은, 그 마음을 완전히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 또한 하린에게는, 지금 현실을 살아내야 하는 하루 속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잡념일 뿐이었다. 그녀는 감정의 틈을 허락하면 다시 무너질까 두려웠다.
'이대로는 안돼, 조금만 더 버텨야해. 그래야 내가 지킬수가 있어.' 하린은 자신을 단단히 붙잡기 위해 마음의 틈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그리곤 그 생각들을 하나씩 접어 마음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또다시 굳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려 했다. 그러나 문을 닫는다는 건, 예전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새어 나온 아픔은 마음 한구석에서 계속 스며 나왔고, 하린은 그것을 어떻게든 덮어버리려 애썼다. 마음은 생각보다 단단하지 않았다. 닫으려 할수록 그 틈새로 또 다른 기억들이 번져 나왔다.
밤마다 드러나는 아픔은 가슴 깊은 통증으로 번졌고, 숨이 막힐 듯한 고통이 새벽마다 밀려와 더는 참지 못해 눈을 뜨게 했다. 생각을 비우려 머리를 흔들어 보지만, 그날의 기억은 좀처럼 하린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외로웠던 걸까,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걸까. 왜 그때 단 한 번만 더 붙잡지 못했을까.' 후회가 밀려오기도 하고, 다른 여자와 인생을 설계했다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그가 힘들었던 부분을 차라리 내게 털어놓았더라면, 감정에 솔직했더라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까. 이런 생각들로 하린은 하루하루 자신이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고 느꼈다.
아이들 앞에서는 언제나 웃고 따뜻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서는 마음의 균열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아이들의 생활 속에 자신의 불안이 스며들지 않도록 늘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그녀의 겉모습은 서서히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하린 곁을 밝게 밝히던 이오의 빛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이 꺼져가듯, 빛도 서서히 숨을 죽여 가고 있는 듯했다. 꺼져 가는 이오의 빛이 눈앞에서 흔들렸지만,
그 빛에 더 이상 마음을 내어주면 안 된다고 결심했다.
아침 일찍 도서관을 찾은 하린은, 평소처럼 도서관의 공기를 정화하듯 창문을 열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내기라도 하듯 책의 먼지를 털어냈다. 일렬로 나열된 책장 사이의 먼지를 털어내자, 창문 틈으로 스며든 빛 속에서 먼지들이 반짝였다. 그들은 마치 빛과 손을 맞잡은 듯, 하린이 가야 할 길을 은밀히 안내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리킨 곳에 하린의 시선이 멈췄다. 그건 하린이 한때 시온에게 건넸던, 구작가의 『그래도 괜찮은 하루』였다.
책장 사이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던 책을 조심스레 꺼내 든 하린은 처음 이 책을 읽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을 단단히 붙잡기 위해 선택했던 방법들, 그리고 혼란스러운 마음속에서도 시온에게 그 빛 한 줄기를 전하고 싶었던 순간이 함께 스쳐 지나갔다.
책을 손에 쥔 하린의 눈빛이 조금씩 밝아졌다. 마치 꺼져 가던 이오의 빛이 다시 그녀 마음속에서 조용히 반짝이는 듯했다. 하지만 이미 새어 나온 아픈 감정은, 잠시 빛처럼 피어오르려던 마음마저 검은 그림자로 덮어 버렸다. 하린은 그 마음을 애써 누르듯,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아 넣었다.
하린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점심도 거른 채, 정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책들을 다시 꺼내어 정리 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숨길 수 있었다고 믿었던 하린이었기에, 이번에도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령 또한 하린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였지만, 하린의 목소리에는 힘이 빠져 있었고, 자신에게 건네는 미소에도 얇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도서관에서 함께 있는 공간 속에 정적과 외로움이 묻어났다. 하린의 빛으로 정화되었던 공간에는 이전과는 다른 공기의 흐름이 감돌았다. 하린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렸고, 한때 따스하던 도서관은 이제 찬기운으로 가득했다.
그 낯선 공기의 온도가 서령의 시선을 흔들었다. 하린을 며칠 지켜 보던 서령은 하린에게 다가 갔다.
“하린, 무슨일 있어? 아까 점심도 안먹고 일하고 있다고 하던데.”
서령에게 만큼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하린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서령에게조차 감정을 보여버리면, 지금껏 간신히 버텨온 마음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괜찮아요, 선배님.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거예요.”
서령은 하린의 억눌린 웃음속에서 미묘한 감정의 온도를 느꼈다. 그렇기에 쉽게 넘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전에도 그랬듯, 서령은 하린을 믿고 이번에도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하린의 고통은 멈춰 있을 때마다 더 깊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가슴속의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고통은 결국 두통으로 번졌고, 집에 도착해 약을 먹었음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듯한 내면의 고통과 머리가 흔들릴 만큼의 외적인 통증이 동시에 덮쳐왔다.
하린은 더 이상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들의 불안한 눈빛이, 그녀의 시야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안정을 찾기 위해 침대에 누웠지만, 그것은 그저 흔들림을 막는 일시적인 피난처일 뿐이었다.
가슴을 쥐어 짜는 듯한 통증이 점점 깊어지며, 하린은 더 이상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누군가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막상 전화기를 들고 서령에게 전화를 걸려 했지만, 매번 신세만 지는 것 같은 생각에 통화 버튼을 쉽게 누를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더니, 집 가까이에서 그 소리가 멈췄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렸다. 하린은 놀란 나머지 몸을 움찔했다. 그 순간, 유하가 하린을 한 번 바라보더니 재빨리 현관 쪽으로 달려갔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도 하린은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본능이 먼저였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거의 기어가듯 현관으로 향했다.
당황한 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하린의 안에서 보호 본능이 번쩍 일었다. 그 마음이 고통보다 더 빨랐다.
“유하야, 누군지도 확인 안하고 문을 열어 주면 어떻게해”
하린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 소리를 내며 유하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유하는 문을 열었고, 곧 몇몇 사람들이 들것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하린의 시야가 흔들렸다.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며, 몸의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하린은 그렇게, 모든 힘이 빠져나가듯 고통 속으로 무너져 내렸다.
119 구급대원들은 문을 열자마자 힘없이 쓰러지는 하린을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