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솥을 눈앞에 두고 끓인 라면
일본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한국에서 3주 전에 보낸 이삿짐이 오늘 도착할 거라는 연락을 받았다. 한 달 정도 걸린다고 안내를 받았던 터라 일주일 정도는 어젯밤처럼 휑한 거실에서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잠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모든 일이 순조로워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지나고서 이삿짐센터 직원 세 분이 도착했다. 일본어가 가능한 신랑이 없는 시간이라 몹시 긴장하며 문을 열었는데 다행히 한 분이 한국어를 하실 줄 알았다. 직원분들이 멘션 복도 바닥과 집 바닥에 천을 깔고 고정했다. 일본의 이삿짐센터 직원분들은 한국의 이삿짐센터 직원분들과 속도감이 달라 낯설었다. 뭐랄까, 먼지를 나지 않게 하려는 듯 천천히 움직였다. 직원분 주변에 서 있다가 일하는데 방해가 될까 싶어, 아이들과 함께 낯선 집 안 이쪽저쪽을 열심히 옮겨 다녔다.
큰 가구들이 먼저 들어왔다. 큰 가구는 식탁, 아이들 책상, 침대와 책장, 그리고 에어드레서가 전부였다. 직원분 두 분이 큰 가구를 옮겼다. 집안을 연결하는 복도가 좁은 이유 때문이지 천천히 움직였다. 위치를 선정하고 놓을 때도 위아래를 여러 번 확인했다. 작업을 지켜보면서 더러는 함께 짐을 옮기면서 나도 모르게 자꾸 시간을 확인했다. 한국이었으면...,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던 것 같다.
다음으로 한국에서 이삿짐센터 직원분들과 숫자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포장한 상자들이 들어왔다. 상자에 적힌 방 표시에 따라 상자가 놓일 위치가 정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좁은 방 안에 상자들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모든 상자들은 거실에 쌓이게 되었다. 직원분들과 상자에 적힌 숫자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물품 목록까지 확인한 후에 모든 작업이 끝났다고 했다. 한국에서처럼 모든 상자를 열어 뜯어 물품을 정리하는 일은 없었다. 좁은 집안 곳곳에 상자가 쌓인 채로 이사는 끝났다.
- 얘들아, 우리 이제 밥 해 먹을 수 있어!
나는 신이 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주방 짐이 든 상자들을 찾자고 했다. 보물상자라도 찾듯 아이들과 함께 상자에 적힌 숫자와 목록을 확인하며 주방 짐이 든 상자들을 찾았다. 냄비와 밥솥 그리고 식기가 든 상자를 먼저 뜯었다.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리는 법이 없는지. 눈앞에 놓인 새 밥솥을 보면서, 밥솥을 포장하던 때의 불암함이 되살아났다.
한국에서 이삿짐을 쌀 때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밥솥이었다. 한국에서는 결혼한 후로 줄곧 5~6인용 큰 전기밥솥을 사용했다. 그것은 언제나 주방에서 꽤 자리를 차지했다. 전압 크기가 다른 일본에서 사용을 하려면 변압기를 두고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변압기라는 것도 찾아보니 꽤 컸다. 일본 집은 주방도 한국 집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였기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나는 운 좋게도 이삿짐을 싸기 전에 일본 집을 볼 기회가 있었다). 과연 밥솥과 변압기를 주방 한쪽에 두어도 되는 걸까. 싱크대와 조리대 뒷 공간에 있는 선반의 절반을 밥솥과 변압기가 차지하게 될 것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봤다. 변압기를 사용하면 가전제품의 고장이 잦아지거나 수명이 짧아지는 일도 있다고 했다.
일주일 넘게 고민한 끝에 압력 밥솥을 사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어떤 밥솥을 살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국산 브랜드가 밥맛이 더 좋을 것 같아 장바구니에 담았다. 결제를 하려는 그때, 익히 아는 해외 브랜드 압력밥솥이 세일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저렴한 가격에 크기가 다른 두 개의 밥솥이 세트로 구성된 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주문을 했다.
밥솥이 도착했을 때, 박스 그대로 가져가면 좋을 것 같아 포장을 뜯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일본에 보낼 짐들을 정리하는데 밥솥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에이, 그래. 혹시 모르니까. 포장을 뜯어 밥솥 상태를 확인했다. 밥솥 뚜껑 안면에 큰 스크래치가 세 줄 나 있었다. 역시 여자의 촉은 무거운 거지, 만족스러운 얼굴로 혼잣말을 하며 뚜껑을 박스에서 꺼내두었다.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뚜껑을 우편으로 보내면 교환해 주겠다고 했다. 적당한 크기의 박스를 찾아서 뚜껑을 담았다. 뚜껑에 달려있던 다른 부품을 다 빼고서. 그리곤 이왕 뜯은 김에 밥솥이나 씻어두자고 설거지를 했다. 물기가 마른 밥솥을 상자 안에 다시 담으면서, 이 부품을 잘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어떻게 한 거지?
그때 그 부품이 안 보였다. 상자 안을 아무리 뒤져도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밥을 해줄 수 없게 되었음을 고백했다. 아이들 얼굴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어쩔 수 없이, 혹시 몰라 챙겨 온 한국 라면으로 아이들을 달랬다. 그렇게 일본 집에서 내가 한 첫 끼는 라면이 되었다.
라면으로 아이들 고픈 배는 달래 놓고 과거의 나를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 믿음으로 주방 짐이 든 상자들을 다 열어봤다. 하지만 부품은 어디에도 없었다. 답답함은 과거의 나를 원망하는데 이르렀다. 아, 좀 잘 챙기지. 내가 이럴 것 같더라니. 저 밥솥을 그럼 어찌해야 한단 말이가.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원망과 함께 계속 이어나가고 있을 때, 퇴근한 신랑이 왔다.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신랑에게 밥솥은 있지만 밥은 할 수가 없다고 했다. 분위기상은 슬픈 드라마의 여주인공 같았다. 입었던 옷을 옷걸이에 걸며 신랑이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 브랜드가 뭔데?
나도 덩달아 덤덤해져선 밥솥 브랜드를 말했다. 신랑은 바로 핸드폰을 들어 검색을 했다.
- 빠진 부품이 뭔데? 여기서 골라봐.
세상에, 내가 그토록 찾던 부품이 있었다. 다행히 일본에서도 살 수 있는 것이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았다. 나는 애처럼 밝아져선 손가락으로 핸드폰 화면을 짚으며 이거야, 이거! 를 외쳤다.
- 주문했어. 이틀 뒤면 온대.
만세! 갑자기 과거의 내가 기특했다. 밥맛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끝까지 고민했던 한국 브랜드를 사서 이런 일을 겪었다면?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지 않았을 생각을 하니 과거의 내가 한 선택이 기특했다. 나는 조금 전까지 원망하던 마음을 거두어들였다. 과거의 나야, 잘했어.
그제야 부랴부랴 온 가족이 달려들어 이불이 든 상자를 찾아 잠자리를 정리했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둘째 날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