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전, 세 번의 주말

본격적인 학교 생활을 앞두고

by 글 쓰는 사람


- 아빠, 오늘은 엄마가 또 어떤 실수를 했는지 알아요?


퇴근한 신랑이 집 안에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둘째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둘째는 신랑이 가방을 내려놓고 외투를 벗는 내내 따라붙으며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큰 아이도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신랑과 둘째 곁을 쫓고 있었다.


우리가 일본에 왔을 때, 학교는 겨울방학을 막 시작한 때였다. 자연히 아이들 등교는 겨울방학 후로 밀렸다. 예정된 등교일은 2024년 1월 8일 월요일. 등교일까지 세 번의 주말이 있었다.


첫 번째 주말은 198개의 이삿짐 상자를 정리했다. 주중에는 집에만 있으려는 아이들을 억지로 끌고 나갔다. 내 목적은 동네 맛있는 빵집 찾기. 스마트폰 지도에서 집 주변 빵집을 검색했다. 걸어서 20분 내외 거리의 빵집을 하루에 한 곳씩 찾아갔다. 겨울이었지만 우리가 얼마 전까지 있던 한국의 추위보다는 덜했고 한낮에는 햇살이 좋았다. 낯선 길을 지도 따라 걸으면 나와 아이들 사이는 가까워졌고 아이들은 내 손을 꽉 잡았다. (그때 찾은 빵집은 여섯 곳이었는데 아직까지 자주 다니는 곳은 한 곳뿐이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 즈음 문을 막 연 가게인데, 그 가게를 갈 때마다 우리가 이사 왔을 때가 생각나서 나 혼자 친구처럼 생각하고 있다.)

둘째가 동네 빵집에서 고른 빵

빵집에서 각자 원하는 빵을 사고 나오면 근처 공원을 서성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둘째는 낯선 공원을 휘젓고 뛰어다니며 무리 지어 노는 동네 아이들을 발견하면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큰 아이는 조용히 공원 의자에 앉아 챙겨 나온 책을 읽었다. 그러다 추워지면 집에 가자는 말을 겨우 했다.


두 번째 주말은 시부야에서 보냈다. 부족한 살림 장만을 위해서였는데 연말이자 주말의 시부야는 아이들과 같이 다니기엔 겁이 날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아이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이 손을 내 옆구리에 끼고 걸었다. 그때만 해도 둘째는 정말 작아서 사람들이 밀려오면 아이 손을 잡고 있음에도 아이가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아이를 내 옆구리 가까이 끌고 와도 인파가 밀려오면 어쩔 수가 없는 때가 생기곤 했다. 가장 사람이 많을 때 시부야를 갔던 우리는, 그 뒤로 시부야는 잘 가지 않는다. 주중에는 역시나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주말 시부야에서 많이 지친 까닭도 있었지만 개학이 가까워질수록 긴장도가 높아지는지 아무것도 하기 싫어했다. 개학을 하면 이런 시간이 잘 없을 것이니 나가자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과 같이 가려고 찾아놓은 미술관, 도서관, 놀이공원, 쇼핑몰 모두 지도에 표시만 해둔 채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했다. 난방이 되는 거실 바닥에 앉아 텔레비전 보기. 그동안 국제학교 시험 준비며 국제 이사로 많이 힘들었을 터라 텔레비전 보는 걸 흔쾌히 허락하면서도, 영어가 나오는 영상을 골라 보게 했다. 아이들은 볼멘소리를 내다가도 학교 이야기를 꺼내면 알았다며, 미국 드라마를 골랐다. 그런 아이들이 고마워서 나도 외출의 범위를 좁혔다.


- 점심은 밖에 나가서 먹자.


외출을 하려면 꼭 샤워를 해야 하는 큰 아이도 그 정도는 받아주었다. 둘째는 집에 다시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는 것만 확인되면 어디든 따라나서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식당에 갔다. 일본어가 안 되는 때였지만 손가락으로 주문도 무사히 하고 식사까지 잘 마쳤다.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에 섰다. 삼만 칠천 엔이 찍힌 주문서를 손에 들고서. 삼천칠백 엔은 한국돈으로 삼만 칠천 원 정도니까 사만 원을 내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줄을 섰다. 내 차례가 되어 계산대에 주문서와 함께 현금 사만 엔을 올려놓았다. 직원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삼만 엔을 내게 돌려주었다. 놀란 나는 계산이 안 되는 건가, 이거 뭐지? 당황스러워하며 삼만 엔을 다시 직원 쪽으로 내미는데 둘째가 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 엄마, 그거 만 엔짜리예요.


그제야 실수를 알아차린 나는 삼만 엔을 지갑에 넣고 만 엔으로 계산을 해달라고 했다. 당연히 손짓발짓으로. 점원은 그제야 만 엔으로 계산을 했다. 둘째는 히죽 거렸고 큰 아이는 어느새 저 멀리로 떨어져선 모르는 사람인양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둘째는 엄마가 돈 자랑을 했다며 내 실수로 웃음거리 만들기를 무한 반복했고 큰 아이는 좀처럼 거리를 좁히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 걸었다. 저녁에 신랑이 퇴근해 돌아오면 둘째는 신이 나서 아빠를 붙잡고 엄마의 실수 이야기를 떠들었다. 그때의 아이들은, 아이다웠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그대로 변함없을 줄 알았다, 그때는. 둘째의 장난기 넘치는 말에 신랑도 웃고 얼굴이 붉어진 나도 웃고 큰 아이도 뒤에서 조용히 웃었다.


개학을 앞둔 세 번째 주말엔 집에서 천천히 학교 갈 준비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신랑이 가족 여행을 가자고 했다. 나는 개학을 앞두고 무슨 여행이냐며 반대했다. 신랑은 개학을 하면 여행 가는 일도 쉽지 않을 거라며 개학 전에 가자고 했다. 여행지는 하코네.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개학일이 가까워지면서 아이들도 나도 한껏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행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지만, 또 그 이유가 여행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여행을 가면 긴장이 좀 풀릴 수도 있겠지, 하는 마음 말이다.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여행 가는 날, 아침부터 삐걱댔다. 신랑은 하코네 가는 기차표를 예매해 보겠다며 먼저 집을 나섰다. 얼마 후, 표를 구했으니 빨리 신주쿠 역으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두 아이와 짐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신주쿠역에 도착했지만 신랑이 있는 개찰구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신주쿠 개찰구는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조금 익숙해졌다). 짐가방을 이고 지고 지하철 내에 있는 지도를 몇 번이고 보고 신랑과 통화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신랑과 만날 수 있었다.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새해 첫 주말, 하코네는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버스 정류장마다 긴 줄이 이어졌고 버스는 밀리는 교통상황 때문에 제시간에 오지 않았다. 바람이 거세서 생각보다 추웠다.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는 점점 말을 잃었다. 어렵게 유람선 선착장에 도착했다. 거센 바람 때문에 오늘은 배가 서지 않는다고 했다. 그즈음 예약한 숙소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신랑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른 선착장을 찾아 나섰다. 많은 사람들 뒤로 줄을 섰고 버스를 탔고 다시 또 긴 줄을 서서 유람선을 탔다. 큰 아이와 나는 추위에 지친 탓에 유람선 위에 올라가 볼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호기심 넘치는 둘째와 여행을 만끽하고 싶은 신랑은 유람선이 출발하자마자 배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찬바람이 걱정이 된 나는 모자며 목도리를 챙겨줬지만 잠시 후 벌게진 얼굴로 내려온 둘째는 모자도 목도리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각한 얼굴로 모자며 목도리는 왜 안 했냐고 다그치는 내 앞에서 둘째와 신랑은 웃기만 했다. 오후 늦게 걸어서 도착한 료칸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다다미방은 건조했고 웃풍이 심했다. 온천물은 좋았겠지만 온천물이 좋다고 즐기기엔 노천탕도 작은 온천탕도 너무 추웠다. 그리고 다음날, 내내 걱정하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온 가족이 감기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약상자 안에서 체온계를 찾았다. 다행히 걱정할만한 체온은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따뜻한 물을 먹이고 프로폴리스 사탕을 먹이고 소금물로 가글을 시켰다. 아이들과 학교 갈 가방을 쌌다. 가방을 싸자 아이들도 비로소 실감이 나는 듯했다. 아이들 얼굴에 낯선 표정이 보였다. 큰 아이는 부쩍 말이 줄어선 제 가방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학교에서 받은 확인 목록도 재차 확인했다. 둘째는 눈을 반짝이며 설렘을 자랑했다.


- 내일은 학교 가는 날이니까 오늘은 일찍 자자.


아이들을 재우고 학교에서 온 개학 안내 메일을 다시 확인했다. 초등과정인 둘째는 개학 첫날부터 수업을 하는 시간표였지만 중학교 과정인 큰 아이는 오전에 오리엔테이션만 진행한다고 적혀 있었다. 중학교 과정이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생각만 했을 뿐, 학교의 안내대로 준비했다. 어떤 의구심도 품지 않았다. 도시락도 둘째 것만 준비했다. 그것이 어떤 일을 불러올지 모른 채.


그때 큰 아이는 13살, 둘째는 10살이었다. 돌아보면 아이들은 어렸고 나는 참 어리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