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의 시작

다정함이 머무는 공간

by 글 쓰는 사람

* 이 글은 2025년 11월 8일 발행된 바 있습니다. 정리를 위해 '도쿄 일상' 브런치북에서 재발행합니다. *


- 딸랑 딸랑


장바구니를 든 노년의 부인이 가게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사장과 노년의 부인이 주고받는 안부 인사가 작은 커피숍 안을 가득 메웠다. 부인이 의자를 뒤로 빼자, 사장이 재빨리 물 잔에 얼음을 담아 테이블에 놓았다. 그리고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적당한 속도의 말로 물었다.


- 따뜻하게?


의자에 막 앉은 노년의 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 요즘 꽤 쌀쌀해졌으니까 그러면 좋겠죠.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에 미소가 지어졌다.

사장은 빠르지만 부산스럽지 않은 움직임으로 매장 입구 쪽에 놓인 원두를 플라스틱 컵에 담았다. 사장이 플라스틱 컵을 들고 주방으로 돌아오자 부인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어제 딸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사장은 원두 기계를 만지다 얼른 몸을 돌려 부인을 향해 섰다.


- 결혼 한 딸?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은 부인의 말을 들으면서 한 손을 원두 기계 위에 올렸다. 사장의 손끝에는 원두 기계의 전원 버튼이 있었다.


- 딸이 오늘 집에 와서 청소를 해주겠다고 했어요.


- 좋은 딸이네요.


부인은 물 잔을 만지작 거리며 웃었다.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며 이야기를 엿들어버린 나도 따라 웃었다. 우리 딸은 나중에 어떤 일로 내게 전화를 할까, 잠시 상상해보기도 했다.


-딸이 4시쯤 집에 온다더라고요.


부인이 말을 전하며 물 잔을 들어마셨다. 사장은 그제야 원두 기계 전원 버튼을 눌렀다. 위이이잉-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원두가 향기롭게 갈렸다. 그 소음 안에서 나는 다정함과 친절, 그리고 배려 등의 따뜻한 단어들을 생각했다.


요요기우에하라. 얼마 전, 지인을 통해 새로 알게 된 동네인데 나는 그 동네가 처음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 시작은, 지인을 따라간 작은 매장 직원의 친절함 때문이었다. 그녀는 우리를 위해 자신이 아는 한국어를 총동원하고 핸드폰 번역기까지 써가며 한국어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한국인인 나는 일본어로 말하고 그녀는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에서 온 지인은 영어로 말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계속 웃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좀 더딘 대화였지만 잔잔한 호숫가를 훑고 가는 바람처럼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굳이 한국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인데도 그녀는 한국어를 떠듬거리며 전시를 설명해 주었는데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러니까 가식적인 느낌이 아닌, 순수함에서 비롯된 듯한 느낌이었다. 수줍은 듯 웃으면서도 우리를 향한 노력을 계속 이어가는 그녀 모습에 푹 빠져버렸다. 다정함이라는 것은 이토록 위험한 것이다. 여하튼, 그런 이유로(중간 과정이 있었지만 그것은 생략하고자 한다), 나는 그녀와 인스타그램 주소를 주고받게 되었고 인스타그램으로 교류를 이어가던 차에 그녀의 소개로 좋은 미술 전시를 마지막날 가서 볼 수 있었다. 전시가 무척이나 좋았던 까닭에 전시를 소개해준 그녀에 대한 고마움도 커지고 말았다. 그 고마움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이들 도시락으로 김밥을 싸던 아침, 그녀에게도 김밥을 가져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오버인가 싶어 주저하다가도 하고 싶은 일은 주저하지 말자는 무식한 마음이 일어 결국 나는 김밥을 들고 그녀가 일하는 매장으로 향했다. 그녀는 내 등장에 크게 놀랐고 내가 건넨 김밥에도 또 한 번 놀라 손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이내 내가 반해버린 그 웃음을 지었다. 환하게. 매장에 손님이 있었기 때문에 긴 대화는 다음으로 미루고 다급하게 매장을 나서는데 이번에는 그녀가 다급한 손길로 나를 잡았다. 그리고는 얼른 제 짐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말차맛 양갱이었다.


- 줄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 미안해요.


한껏 들뜬 마음을 가슴에 다잡고 역을 향해 걷는데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 마음을 불편하게 들고 역 안에 들어섰다. 스이카를 꺼내며 개찰구를 향해 걷다가 멈추었다. 스이카(교통카드)를 가방에 넣고 좀 전과 반대 방향의 출구를 찾아 걸었다. 아이들이 집에 오기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야지.

출구를 나서자 예스러운 풍경이 보였다. 쌀쌀한 가을바람과 구름 잔뜩 오후에 꽤나 어울리는 색감의 골목이었다. 가게 하나를 지나자마자 커피 전문점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간판에서부터 느껴지는 분위기가 좋아 가게를 들어서기도 전에 커피에 취한 것 같았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 다양한 산지의 커피콩이 가득 진열된 공간이 보였다. 가게 안을 지배하는 진한 커피 향은, 온몸에서 맡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테이블 가장 안쪽에 앉은 노년의 신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얼른 손가락 하나를 해 보이며 혼자 왔다고 말했다. 신사는 미쳐 내가 보지 못한 공간으로 시선을 던지며,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 어이, 손님!


그제야 매장 구석 자리에 앉아 노트북으로 야구 중계를 보고 있는 흰머리가 성성한 남성이 보였다. 하늘색 셔츠에 남색 줄무늬 앞치마를 단정하게 입고 있는 남성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사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내가 바테이블을 바라보자 바테이블 구석 자리에 앉은 신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신사가 앉은 반대편 끝에 앉았다. 사장이 얼음이 담긴 물 잔을 내 자리에 놓았다. 한 장짜리 커피 메뉴도 내 앞에 놔주었다. 나는 스트레이트 커피 종류를 읽다가 사장에게 말했다.


- 산미가 없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추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사장은 그렇다면 만달린이 좋겠다고 했다.


- 아이스로도 가능한가요?


사장은 아이스는 아이스커피가 맛있으니 그걸 주문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변죽이 심한 초가을 날씨에 옷을 잘못 입은 탓에 시원한 것이 마시고 싶었지만 추천받은 만달린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사장이 내 앞에 서서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노년의 신사가 잡은 커피잔을 한 번 쳐다보았다. 그도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 그럼, 만달린으로 부탁드립니다.


사장은 알겠다는 인사를 짧게 하고는 주방을 벗어났다. 사장은 문 앞에 진열된 커피콩 자루에서 원두를 퍼 담아 주방으로 돌아왔다. 주방 한가운데 놓인 작은 원두 기계에 원두를 부었다. 위이이잉- 원두가 향기롭게 갈렸다. 원두가 갈리는 사이 사장은 잔을 골라 꺼냈고 커피잔 안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 커피 필터도 따뜻한 물로 적셨다. 갈린 원두를 적신 커피 필터 위에 담았다. 뜨거운 물을 주전자로 천천히 부었다. 잔 위에 올린 필터에서 마지막 커피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필터를 한쪽으로 치운 사장은 커피잔을 내 앞에 놓았다.


만달린 커피는 추천대로 산미가 적었다. 커피 향이 은은하고 부드러웠다. 그렇다고 옅은 것은 아니었다.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향과 맛. 사장은 다시 구석 자리로 돌아가서 컴퓨터 화면으로 야구 중계를 봤다. 노년의 신사가 역시나 큰 소리로 사장을 불러 계산을 하고 나갔다.


가게 안에 손님은 나 혼자가 되었다. 커피 맛을 음미하면서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넓지 않지만 깔끔하고 세련되지 않았지만 멋스러움이 있었다.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들만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이 작은 동네, 역에서 마을로 걸어 들어가는 길, 오후가 이렇게 한적하다면 장사가 될까, 그래서 저렇게 야구에 빠져 계신 건가, 하는 생각들이 이어졌다.

- 딸랑 딸랑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장바구니를 든 노년의 부인을 시작으로 또 한 명의 장바구니를 든 노년의 부인이 야구 이야기를 시작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두 번째 부인과 사장은 야구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첫 번째 부인은 야구 이야기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옆에서 간간히 추임새를 넣었다. 알고 보니 그날은 오타니의 경기가 있는 날이었다. 오타니에 대한 이야기가 점점 더 커지던 즈음에는 두 번째 부인과 눈이 마주쳐 나도 모르게 호응을 하기도 했다. 나는 부인의 말을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은 안경을 헤어밴드처럼 올려 쓰고서 큰 소리로 내 호응에 답했다.

- 그래, 정말 그렇다니까!


- 딸랑 딸랑

이번에도 장바구니를 손에 든 여성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내 또래로 보였는데 사장이 앞선 두 부인과는 달리, 그녀에게는 메뉴판을 주고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단골은 아닌 것 같았다. 나처럼 단골이 되고 싶은 사람이겠지,라고 마음대로 생각했다. 나는 부인들 사이에 앉아 대화를 엿들으며(물론 백 프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 동네 살았다면 틀림없이 단골이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다음에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을 커피 향처럼 진하게 했다.


- 딸랑 딸랑


또 한 번 벨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옷차림이 단정한 노년의 신사였다. 예상대로 사장은 메뉴를 묻지도 않고 원두를 퍼 담았다. 내 또래의 여성을 제외하고 모두가 안부를 묻고 오타니를 묻고 야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오타니를 잘 알았다면 한 마디 거들 수 있었을 텐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내가 너무 답답했다. 아쉬움에 커피잔을 들어마셨다. 잔에는 이제 커피 얼룩이라고 불릴만한 아주 아주 적은 양의 커피만 남아있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러 올 마을 사람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엔 나도 이 다정함에 속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