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로등 Dec 13. 2021

브런치를 하는 이유


목표가 없다면 매 순간순간들이 얼마나 그저 부유할 수 있는지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20년 전, 1년의 인턴 기간이 지난 후 나는 채용될 수 없었다. 그 전에도 선배들이 정규직으로 채용되지 않고 있었고, 막상 내가 인턴을 마치던 때의 상황이 확 바뀌기도 해서 그랬을 것이다.

인턴 동기들과 소위 문전약국을 표방하는 곳에 취직을 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두어 달 만에 폐업을 해버렸다.

그 당시로는 두둑했던 퇴직금을 받고 우리는 제주도에 같이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내 생활은 자취집에 국한되고 말았다.


그때 다이어리에 쓴 문구들이 있다. 10년 후의 계획 같은 것들이었을 것이다. 

몇 년 뒤에 읽어본 그 다이어리에는 공부를 더 하고, 취직도 하고 아마 책을 쓴다는 얘기도 있었을 것이다.

읽어보니 대충 다 이뤘길래 몇 년 전의 나를 기특해하며 시원스레 다이어리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지금은 그 다이어리가 없다.


다시 상황이 바뀌어 기간직을 거쳐서 정규직이 되고, 본격적으로 남들이 안 해본 업무에 투입되면서 필요한 대로 무엇이든 해 나가다 보니 딱히 목표를 의식하지도 않았는데 뭔가 스펙이랄만 한 게 쌓여 갔다. 업무에 필요해서 대학원에 갔고, 연구를 하다 보니 석사 논문이라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게 썼다. 그러고 나서는 누군가 전문 분야의 인증시험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미국까지 가서 합격증을 받아냈다는 얘길 듣고 나도 한 번 해보자 싶어 인증을 따내기도 했다. 박사는 넘어야 할 산이라고 조언해 주시는 분이 계셨고, 지금도 그 말투와 의미를 기억하지만, 더 이상 갈 필요가 없는 길로 보였다.


직장에서 전공만이 전부는 아니므로 회사라는 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경영학을 공부해서 학사 학위를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하기도 했다. 물론, 주말과 밤에 전혀 모르는 전공을 3학년부터 공부한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재미있지도 않고 무엇보다 스펙 욕심이 컸던지라 번아웃만 된 채 그 후로 스펙을 위한 공부의 길은 쳐다도 안 보게 되었다.


어쨌건 그쯤에서 돌아보니 굳이 목표를 정하지 않고도 자연스레 열정을 따라가면 뭔가 멋진 게 이뤄진다는 점을 깨달았나 보다.


그래서 모든 일이 자연스레 그리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목표가 없는 장기 연애는 표류했고, 결혼 후에도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기는커녕 닥치는 상황에 반응하기 바빴다. 원했던 아이들이지만 막상 내 책임으로 다가왔을 때에는 수면부족과 체력 저하와 같은 육체적 문제뿐 아니라 모성애라는 것은 타고나는 것이 아닌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며 아이들에게 어른 대하듯 한 것도 사실이다.


육아도 힘들고 직장생활은 예전처럼 열정을 불사를만한 절대적인 시간이 없어서 몰입하지 못하다 보니 자책감과 결혼생활에 대한 좌절감만 커졌다. 게다가 남편과는 주말부부가 몇 년간 되었다가 이후에는 아예 해외로 발령이 나면서 일 년에 한 번 얼굴을 보는 사람이 되었다.


뭔가 나를 잃지 않기 위해서 새벽 네시에 일어나 글을 써보길 몇 달. 그게 내 생활에 별 에너지를 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자 영어로 눈을 돌려 그 시간에 일어나 두 시간씩 영어를 공부했다. 졸린 눈 비벼가며 책을 읽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어디선가 자신만의 책을 써야 한다는 글을 무수히도 읽었지만, 언젠가는 열정이 나를 그리로 이끌지 않을까? 그렇게 하는 게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그래도 남들 보기 좋은 직장이 내게도 좋은 직장이려니 하며, 예전 열심히 해서 잘 되어가던 때만을 떠올리며 하루하루 지냈던 시간이 근 9년이다.  첫째가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마지노선인 만 8세의 생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직장을 쉰다는 것은 두려웠지만, 결혼을 선택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남편, 아이들. 그리고 나 자신.


휴직을 한다고 하자 지인들은 이제 2년 후에 책 한 권 나오는 것이냐며 진심인 듯 눈을 반짝였다.


나도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2년이나 집에 있을뿐더러 낯선 나라에서 이국적으로 살아갈 생각을 하면 당연히 책 한 권은 나오고도 남을 터였다.


그런데, 2년을 쉬고 복직을 한지도 어언 1년 반이 되어 간다.


당연히 책은 나오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지난 20여 년 간의 깨달음이다.


엊그제 김애리의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를 읽으며 저자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책 쓰기가 내 현실로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 나는 목표를 세운다. 분명 이 글을 다시 보며 창피해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나는 2년 후에 내 이름 석자가 저자로 쓰인 책을 낼 것이다. 작고 예쁜 책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분명히 그 책을 읽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이 글을 쓰며 다음 2년의 한 페이지를 채워가는 것이다.


더 이상 그냥 떠다니는 순간들이 내 삶을 가득 채우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작가의 이전글 상평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