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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Jul 07. 2023

정기검진, 딴생각, 순간에 살기

23.07.06


오늘은 6개월마다 받고 있는 유방정기검진일이다. 그래서 멀리 문정까지 원정을 다녀왔다. 유선세포증식증이라는 금방 외워지지도 않는 이것이 내 유방의 상태다. 그러니까 계속 뭔가가 자란다는 것. 아직 큰 질병은 아니지만 큰 질병을 야기할 확률이 높다는 말인데. 유선을 따라 물이 찬 물혹이 생긴다. 것도 아--주 많이. 선생님말로는 참 지저분하단다. 초음파를 보는 의사의 시선에선 나의 유방초음파는 도화지의 낙서 같을까? 물혹이 많아서도 그렇지만 계속 유방 안의 상태가 변화한다. 나는 내 것만 보니 알 수 없다. 물혹이 또 생기고 커지고 혹은 작아지고 어떤 땐 없어지기도 해서 1년에 한 번으로 검진주기를 늘릴까 고려한 적도 있다. 그러나 웬걸.  4년 정도 6개월에 한 번씩 검진을 하며 최근 2년 동안 조직검사와 맘모톰(조직을 완전히 제거하고 조직검사)을 해야 하는 변화가 연이어 있었다. 물론 악성은 아니어서 아직까지 이렇게 무탈하다.




오늘도 여느 검진때와 마찬가지로 지저분한 유방 탓에 팔이 저리게 한 시간은 초음파를 봐야 할 것이고, 너무너무 악 소리 나게 아픈 유방확대촬영만 안 했으면 싶고, 그동안의 총 검사 횟수 대비 조직검사 같은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 상황의 비율로 봤을 때 안 좋아 보이는 것들이 있지만, 하나가 아니므로 특정할 수 없고, 그래서 고민을 안고 다시 6개월 후에 보자는 꼼꼼쟁이 선생님의 진단을 받지 않을까 하는. 여유로운 마음으로 신유진작가의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에 푹 빠져 지하철에 몸을 맡겼다.




12시 진료인데 대기시간이 한 시간이라니. 예약제가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그래서 그나마 진료를 볼 수 있음을 떠올리며 그저 오던 길과 같이 불평하지 않고 여유롭게 기다렸다. '1시에 들어가면 2시는 돼야 끝날테니, 밥이 너무 늦겠군.' 별일 없을 땐 밥 먹는 게 별일이다.




초음파가 시작되면 내 머리 위의 모니터로 초음파영상을 동시에 볼 수 있는데, 선생님이 아무 말 없으니 난 모니터상단의 시계만 눈에 들어왔다. 1시 15분, 괜히 오늘은 빨리 끝날 것 같다. 1시 35분, 이제 왼쪽 끝. 오른쪽 시작. 글렀다. 배는 고프지 않은데 시계를 보며 그냥 밥을 찾고 있었다. 결국 2시나 되야겠군.




너무 조용한가 싶어 선생님이 말을 꺼내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괜히 저번에도 했던 말을 또 하거나 역시나 이번에도 너무 혹이 많고 변화도 있지만 검사를 요하는 혹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말이 오갔다. 고민된다, 애매하다는 선생님의 말이 한 때는 답답하기도 했지만, 오늘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깨끗한 도화지에 콕하고 잘못 물감이 떨어진 것처럼 판단하기 쉬운 케이스들도 있겠지만 나 같은 사람도 있지 않겠나. 선생님이 전문가가 아닌 나보다 덜 답답할까. 내가 모르는 것에 내가 아는 범위로 판단하려는 오류. 그렇게 선생님을 이해하고 나니 졸리기도 하다. 어두운 초음파실에 한 시간을 누워있지만 팔만 저리지 않다면 그리고 내 머리 위에 모니터만 없다면 그냥 모자란 잠을 자고 싶은 건 이번만은 아니다.




오늘따라 너무 여유를 부렸나. 늘 하던 대로 미리 걱정을 한 트럭을 하고 살아야 걱정하느라 고생했다면 별일 없음이라는 포상을 주는 건데. 선생님의 말투가 확신에 차면 그때는 나도 정신을 차려야 한다. 전반적으로 물혹의 크기들이 많이 커졌고 그중에 어떤 것은 맘모톰으로, 어떤 것은 조직검사를 하자한다. 후자는 조직검사 후 악성이 아니어도 맘모톰으로 제거하자는 것이 이상해 그냥 맘모톰을 하는 것을 어떤지 물었더니, 모양과 크기가 너무 안 좋단다. 혹여 큰 병원으로 가야 할 때 혹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다는 의견이다. 결과가 음성이더라도 조직검사의 정확도를 고려해서 맘모톰으로 완전 제거를 하고 다시 조직검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정도 되면 밥생각과 졸음은 이미 멀리 달아나버린 후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여기까지. 더 이상의 걱정과 긴장은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 하는 검진도 아니고 검사도 아니다. 나의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듯한 선생님의 더 단단한 말투는 경각심을 일으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고 확률의 문제다. 오늘은 말일뿐이 아닌가. 설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걱정을 할 일인가. 치료를 할 일이지.




어쨌든 검사날짜를 잡고 나는 늘 먹던 건물지하의 콩나물국밥집으로 갔다. 점심시간이 지난 한산한 시간, 혼자 앉은 식당의 테이블에 콩나물국밥이 나오고 청양고추와 김가루를 얹은 후 국물을 떠먹는데. 그래 이 맛이다. 사람이 이렇다. 맛있는 거다. '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하는 진부한 말이 떠올랐는데 곧 그건 아닌 거 같은 거다. 먹자고 하는 일은 아니고 살자고 하는 일인 거 같다. 그게 뭐든, 죽자고 하는 건 아니지 않겠나. 오늘 정기검진도 그렇고, 이 콩나물국밥을 맛있다며 만족하는 것도 그렇고, 더 이상 걱정을 붙들지 않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게 뭐든 모두 살자고 오늘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그러자니 사는 거 별거 없기도 했다. 그저 순간순간에 충실하면 더도 덜도 아닌 것인데, 더하기도 덜하기도 하다가 놓치거나 미리 진을 빼고 살았구나 싶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와 지하철을 타고 다시 신유진작가의 '그렇게 우리의 이름이 되는 것이라고'에 푹 빠져 집까지 왔다. 소설은 정말 오랜만인데, 마치 에세이를 읽는 기분이 들어 주인공의 감정에 이입하는 시간이 좋았다. 신유진작가도 좋아졌다. 에세이가 아닌 소설을 읽으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처음 들었으니까. 그렇게 집에 와 더 성의껏 저녁을 차려 먹고 아침에 하지 못한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감사하지 않은가. 살아있어서. 그리고 평온한 지금의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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