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밀품 Aug 13. 2024

내 빤스


2024년 한창 여름



화장실에 왔는데 빤스가 내려가지 않는다. 물론 볼일을 보고 올리려는데 그도 쉽지 않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텃밭에 나와 그렇다. 더위에 기운을 훌러덩 벗어버린 듯할 때는 엉덩이와 허벅지에 걸려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지 않는 빤스도 힘겹다. 힘겨운 건 힘겨운 거고, 그제야 달아오른 얼굴을 확인하고 바지가 허리춤은 물론 종아리까지 푹 젖어 엉덩이가 축축한 걸 다시 확인했더니 희열이 온다. 아무리 집에서 머리로 밭을 수백 번 간들, 익은 토마토를 딴들 무슨 소용이랴. 다른 텃밭들이 가을파종에 이미 들어간 걸 보며 따라가지 못하는 나의 속도에 괜히 근심이었다. 근심이 밭의 가을준비를 대신해주진 않으니, 나는 오늘 할수있는 수확에 열중하고 풀관리만 해야지 했다. 더 일찍 텃밭으로 나갔어야 했는데 방에만 있다가 나와도 반가워 희뇨를 하는 감자가 있으니, 꼬리가 감자를 들어 올릴 듯이 흔들어 돌고 있으니 자꾸 발이 잡힌다. 밥 먹는 훈련하고 같이 좀 놀고 다시 놀고 그러느라 조금씩 출발이 늦어졌다. 요즘 같으면 새벽 5시에는 나가야 해에 덜 데일 텐데 8-9시만 돼도 한 낮 같다. 그래도 더운데 그냥 있다 보면, 땀을 계속 흘리고 있다 보면 그게 또 덥구나, 흘리는구나 그런다. 그러면서 집에 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라테를 한잔 마시며 더위를 식히는 현실이 되는 상상을 하면 마치 반가워 저도 모르게 흔들리는 거겠지 싶은 감자의 꼬리 같은 마음이 든다. 일주일사이 자란 오이 노각 호박 깻잎 토마토 바질 대파 가지를 따고 기운을 내어 빈두둑 일부에 거름을 주고 뒤집었다. 조금씩 해두어야 씨는 못 뿌려도 모종은 심지. 시금치 당근은 그래도 씨를 뿌려야지 싶고 무랑 배추 브로콜리를... 이런, 빈 두둑이 좁다. 올 가을엔 욕심부리지 말고 무랑 배추만 심어야지 했던 생각은 언제 적인가. 가을밭에는 그래서 결국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두근.  24.8.13

매거진의 이전글 생채는 고소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