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한 칸 비우기

/ 조금만 더 무해하게 살아보기 /

by 밀품


22.01.11


냉장고 냉장실의 한 칸이 오늘 다시 비워졌다. 새해, 시골 부모님께서 주신 갖은 반찬과 시골 농작물들로 냉장고만큼이나 보는 나도 배가 불렀다. 배부른 냉장고가 되면 되도록 반찬거리들을 새로 사지 않고 냉장고 사정대로 집밥을 지어먹는다. 다행히 나는 집밥순이고 집밥 짓기를 굉장히 즐기니 새로운 무엇이 먹고 싶어 안달하는 순간만 컨트롤하면 이 루틴이 꽤 쾌감을 주는 걸 이제는 알아버렸다. 과하게 소비하지 않고, 있는 것을 남김없이 먹고, 필요한 만큼만 소비하는 균형을 찾아가는 게 재미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재미는 단번에 되지 않는데서 오는 것 같다. 냉장고 한 칸을 비우기 시작한 때에는 비우는 칸 위아래에 반찬통을 꽉 몰아넣고 비우는 척도 하고, 새로운 찬거리에 홀려 ‘인생 뭐 있어!’ ‘내가 뭐 대단한 거 먹어?!’ 합리화도 하고, 상해 가는 채소를 보면서도 차마 치우지 못해 대체 정체가 무엇인지 모를 때까지 방치하기도 하고, 늘 ‘한 칸이 비워져있어야 한다’는 강박에 자책 섞인 불편도 느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일상과 실천의 균형이 자연스럽게 맞춰가는 걸 느꼈다.



살다 보면 냉장고가 꽉 차기도 한다. 그럼 그때는 하나씩 비우면 된다. 간단하다. 늘 그래야만 하는 것도, 늘 한결같을 수도 없지 않은가. 유연한 마음이 지속 가능한 실천의 동력이라는 생각을 한다. 특히 식탁을 차리는 것처럼 일상적일수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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