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것을 들였는데 내보낼 것이 없는

/ 조금만 더 무해하게 살아보기 /

by 밀품

22.04.08


나는 입술이 건조한 탓에 립밤을 사시사철 사용한다. 그러다 보니 주머니엔 늘 가지고 다니는 필수품이다. 일 년이면 3-4개 정도의 립밤을 쓰는 것 같은데 늘 갈등하는 지점은 다 쓴 케이스를 버릴 때다. 속 깊이 묻어있는 오일 성분의 립밤은 깨끗하게 닦기도 어렵다. 화장품 케이스는 재활용이 거의 되지 않는다는 걸 어디선가 본 기억은 이럴 때 상기된다. 그냥 버리자.




엊그제는 다 쓴 세탁세제를 리필하려고 리필 상점에 가야 했다. 가는 길에 덜어 살 수 있는 비건 립밤을 샀다. 종이케이스에 온전히 담긴 립밤 완제품은 가격이 꽤나 높았다. 그런데 리필용은 상당히 합리적인 가격선에서 구매할 수 있어 선택에 깊은 고민은 필요치 않았다. 아주 작은 샘플 화장품용 케이스에 6g을 담으니 3천 원이 조금 넘는 정도. 써봐야 알겠지만 한 달 이상은 넉넉히 쓸 듯싶다.




집에 새물건을 들이면 늘 동시에 집 밖으로 나가야 할 쓰레기가 동반된다. 이런 현실이 불편은 해도 일상적이다 보니 반대의 경우에 닥칠때면 늘 기분이 참 희한하다. 립밤을 새로 들였는데 쓰레기가 없다. 이 기분은 꽤나 신선한 경험이다. 특히 공산품이라면 그것이 배가 된다.

'이럴 수가 있다고?'




이 기분은 꽤 중독적이다. 다음에도, 그다음에도 느끼고 싶게 가볍고 홀가분하다. 포장지를 열고, 사용하거나 먹을 대상을 꺼내고, 포장지를 플라스틱과 비닐과 종이와 일반쓰레기로 구분해 각자의 분리수거함에 넣어야 하는 이 번다함이 없다. 게다가 대부분 비닐은 한번 세척해야 하는 단계마저 패스 하게 되니 시간과 물 절약의 효율마저 안겨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조금 더 무해하게 살았다는 내적 안도가 벅차게 온다. 그 안도는 다음을 기약하는 참 상서로운 기운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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