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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Sep 30. 2022

보라보라한 9월

22.09.30


날짜를 적다 보니 구월의 마지막 날이다. 부모님 포도밭의 포도 수확을 마치고 육신이 정상궤도로 돌아오지못하고 헤맨다. 20일 남짓 또 다 쏟아부은 것이다. 먼길 대중교통으로 오고감도 노동도 있었지만 나에겐 신경성이 더 큰일임을 안다. 일 년 중 딱 9월 한 달을 비일상으로 불같이 지내다 보니 매해가 처음 같다.




늘 처음 같은 것은 내가 포도농사를 직접 짓지 않는 것도 이유이겠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포도가 자연물이기 때문이다. 수발주에 의해 뚝뚝 찍어내는 공산품이 아니니 포도를 비롯한 주변의 모든 여건들이 매해 변수이고 대응도 그러해야 하니 늘 새로울 밖에. 올해는 추석이 아주 일러 포도 수확적기에 판매적기를 맞추기에 어려웠고 태풍 힌남로 영향으로 수확을 시작하면서 불안을 낳았고 아빠의 무릎 수술로 엄마에게 가중될 노동량에 마음이 쓰였고 올여름 궂은 날씨로 포도작황이 좋지 않아 무엇보다 불안했고 온라인 판매를 자처한 나의 책임감, 그 외 나를 건드리고 지나가는 여러 상황들과 일어나는 마음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렇지만 매해 9월을 통해 다져지는 것들도 있다. 클레임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고 올해를 교훈 삼아 내년은 어찌해보겠다는 마음가짐과 계획들은 긍정적이고도 발전적이고, 부모님을 통해 나와 대면하는 울고 웃는 순간들은 스스로를 소진하기도 하지만 '나의 현재'를 자각하는 보물들이다. 객일 때는 일하기가 더 어렵다. 부모님을 돕는다기보다 9월마다 찾아오는 내 일이 되면 일의 많고 적음을 떠나 몰입하고 신나게 일할수 있어 좋다. 쓰나미같이 몰려온다할 만큼 9월의 포도에 신경을 쓰고 있다면 이미 나는 객이라 할수도 없을 지경인 것 같은데 라며 웃는다.



이렇게 포도와 함께 찾아온 불면과 수년만에 극심하게 도져버린 만성질환은 포도 수확과 판매가 정리되어가면서 차차 호전되는 걸 보니 신경성임을 더 자각하게 된다. 나에겐 질 좋은 수확이다. 잃어버린 입맛과 집중력 저하와 어찌할 바 모르게 찾아오는 피로와 얇디얇은 종잇장 같은 기력은 어쩌겠나. 모르는 바 아니니 또 어찌어찌 나를 회복해가며 오늘을 살겠지. 어떤 하루가 되든 나름 잘 지낸 하루가 되겠지. 그러다 보면 올해가 지겠구나.     




오늘 이른 아침 카페에 앉자니 햇살에 데워진 테이블과 의자가 어찌나 따뜻한지, 텀블러의 라테가 뿜는 연기가 얼마나 안정감을 주는지, 그걸 보고 내가 추웠구나 알게 된 이야기를 쓰려고 시작한 글이 오늘도 삼천포로 풍덩. 그러나 쓰고 나면 진짜 하고 싶고 정리하고 싶은 이야기였구나 알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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