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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Oct 07. 2022

맥주병 뚜껑과 자존감

추억이라고 하자

22.10.07


자존감이 곤두박질치는 순간이 있었다. 그게 언제냐면 나도 모르는 이들이 희희낙락하며 따는 맥주병 뚜껑이 무려 멈춰있지도 않고 지나가는 나의 광대를 때릴 때다. 지금 생각하면 웃긴 상황만 남았지만 그 순간 느꼈던 무안과 치욕은 2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암흑 같던 나의 앞날과 대치하던 시간들보다 이 순간의 기억은 더 생생하다. 왜냐면 병뚜껑이 광대를 때리는 순간 나의 자존감은 그런 게 있기나 했는지 싶게 텅 비어버렸으므로.




내가 얼마나 우스웠으면 밤도 아닌 대낮에, 호프집도 아닌 학교 쪽문 앞 슈퍼 파라솔 앞에서, 맞기 좋게 멈춰있지도 않고 걷고 있는 내가 픽되어 하필 맥주병을 떠난 뚜껑이 그 순간에 나를 향해 날아왔겠나. 조금만 나를 배려했다면 옷 위를 때릴 것이지, 것도 과분했다면 손등이나 조준할 것이지, 여린 맨살의 얼굴로 날아오다니. 그래서 꽤나 아팠다.




문제는 아팠다는 거다. 아파서 짜증이 났다. 아프지 않았다면 그냥 툭 털고 가던 길 가고 말 것을 아픈 게 문제였다. 이 사태의 가해자에게 인상이라도 쓰고 싶었다. 그래서 날아온 것이 맥주병 뚜껑임을 확인한 순간 직감적으로 고개를 들어 파라솔에 앉아 있던 두 남자를 보았다. 아니 두 남자임을 눈치챘다. 빤히 쳐다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두 남자가 앉아 있는 파라솔에서 이 병뚜껑이 날아왔음을 초광속으로 눈치채는 순간과 동시에 나는 스르르르 스쳐 지나갔다. 아무 일 없던 듯, 아프지 않다는 듯, 전혀 무안하지 않다는 듯.




이 장난 같은 상황이 무너져 봐라 하고 나에게 내린 벌 같았다. 어디까지 내가 꺼져야 한단 말인가, 세상이 소환됐다. 세상 참 힘들다, 내 자존감 따위는 바위같이 단단하기는커녕 구겨지지 않게 지키고 사는 게 이리 어렵나. 그때는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존감이 가장 얄팍했던 때가 대학교를 다닐 때였으니까.




대학교를 입학하자마자 8살 많은 동아리 대선배를 짝사랑했던 걸 들켰을 때 느꼈던 무안에 눈물 흘렸던 것이 시작인 것 같다. 사실 그렇지 않을 텐데 내가 작아지는 걸 자각하기 시작했던 때가 이 때였으므로 그렇게 기억한다. 여하튼 내 기억장치에는 왜 그런지 20대 나의 자존감이 자주 찢어지곤 했다. 아마도 부모님 우산을 벗어나 주거도 경제도 독립해 살게 되면서 나와 직면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지금 돌아보며 조금 아쉬운 것은 그 무안과 통증이 진짜라고 믿고 갇혀있던 시간이다. 나는 이렇게 작고 별거 없는 존재인데, 세상은 이렇게 별거 있는 것 천지라니.




나는 이제 그때를 기억 말고 추억할 수 있다. 나의 자존감은 그 사이 제법 주름이 펴졌고 단단해졌다. 지금은 병뚜껑이 날아온 그날을 소환하면 웃기다. 너는 이런 경험 있어? 한정판 경험이야, 꽤 아프다.. 크게 웃으며 말할 수 있다.




20년 전도 나였고 지금 이 순간도 나이다. 들춰보기 눈물겨운 나는 없다. 중요한 건 오늘의 나는 세상을 탓하거나 스스로를 구렁으로 빠뜨리는 데 어느 날보다 소극적이다. 그리고 내일은 더 그럴 것이다. 내일의 기억아닌 추억거리를 쌓으며 나는 오늘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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