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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품 Mar 24. 2023

입바늘

23.03.24



3주 전쯤부터 입바늘이 돋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나이가 들면서 입바늘이 나이만큼 아파진다. 어릴 땐 돋았구나, 나았구나 하고 지나갔던 입바늘이 이젠 한 번씩 찾아올 때마다 몸과 뇌리에 통증을 쿡 찍어 눌러 자리를 남기고 간다. 위치도 그렇다. 보이는 아랫입술의 바로 안쪽. 입을 다물고 있어도 윗니가 닿고, 말하면 입술이 부딪히고, 운동을 하느라 입으로 숨을 쉬면 마른 입술이 순간 쩍 하고 붇으며 통증을 주고, 숟가락으로 뭘 먹으면 숟가락바닥이 탁 닿고, 차를 마시면 컵에 닿는 딱 그 위치에 입바늘이 자리 잡았다. 입으로 뭘 하든, 안 하든 아픈 자리에 돋아 점점 커지고 점점 아파왔다.




어릴 때처럼 그렇게 왔구나갔구나 하기엔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 입바늘에 대해서 알아낸 것도 있다. 한동안은 통증이 매일 갱신되지만 것도 딱 한계점이 있다. 그건 눈으로 보면 안다. 입마늘의 하얀 분화구가 붉은 기 없이 하얗게 덮이고 주변이 더 이상 붉을 수 없을 정도로 빨갛게 변해 더 이상 심해질 수 없겠다 싶은 지경이 온다. 엄마의 표현이었는지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난 누군가의 표현을 빌어 이 순간을 '익을 데로 익었다'라고 부른다.




다 익어버리면 이제 나아지기 시작한다. 그건 경험상 확실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다 익은 순간을 눈으로 확인한 후 거짓말같이 불편하던 일상이 이만저만해지기 시작했다. 괜찮아지기 시작한 첫날은 '어라, 물먹는 게 편하네!' 했다. 그리곤 그다음 날부터는 입바늘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3주 매일같이 통증갱신을 선사하더니 단 이틀 만에. 또 나는 이틀 만에 마치 아프지 않았던 것처럼 불편의 기억을 잊었다. 그리고 나아지기 삼일째 되는 날 라테를 마시다가 알아챘다. '아, 입마늘!'




상처를 이렇게 잊을 수 있다면. 이렇게 새까맣게 말이다. 입바늘은 너무너무 아프다가도 이번처럼 바보 같을 정도로 잊어 먹을 예정이므로 다음에 입마늘이 또 찾아올걸 알지만 무섭지 않고 불안하지 않다. 늘 같은 기로에서 화나고, 짜증 나고, 자책하고, 싫어지는 지점이 있다. 통곡할 수 없어 목구멍을 꽉 채워 치밀고 올라오는 울음을 있는 힘껏 짓눌러 참아 낸 작년 가을 어느 날은 터트리지 못한 것에 목도 가슴도 정말로 아팠다. 그런 순간이 처음은 아니다. 하물며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나를 간수하지 못하면 울음이 차오르는 걸 방치하게 된다. 반복해서. 그래서 다음 언젠가가 미리 불안하다, 나는.




왜 입바늘처럼  그렇게 까맣게 잊지 못하고. 또 입바늘은 다시 돋을 걸 알면서도 불안하지 않으면서. 그래서 입바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가 명을 다할 때까지 앞으로 입바늘을 천 번 맞이한대도 올 때는 한 번이다. 천 번이 한꺼번에 오지는 않는다. 지난 시간 나에게 몇 번의 입마늘이 찾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을뿐더러 앞으로도 얼마의 횟수를 거듭해 올지 관심 없다. 그저 이번 한번 찾아온 것을 며칠 기억하겠지. 글을 쓰고 있으니 이번엔 평소보다 얼마간 더 기억하려나.




목구멍을 뜨겁게 달구고 채우는 그 순간을 나는 과거형도 진행형도 미래형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끝이 없다. 그게 입바늘과 상처의 차이였다. 끝도 없다는 불안, 그래서 나아지지 않는다는 걱정, 언제 그럴지 몰라 찾아오는 안절부절, 그러다 나아짐에 지지부진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 그렇구나. 상처가 덧나면 며칠 지나 아물고 지나갈 거라는 확신. 그렇게 상처를 한 번씩 끊어 보내는 거다. 천번은 한번에 오지 않는다. 입바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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