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로 가지 않던 제사 집엘 갔다. 아직도 각 집에서 대표들만 오셔서 그리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아니지만 거리두기가 끝난 후 처음 맞는 시댁 제사라 두 이모님은 직접 따신 고사리를 가져오셨고, 우리 어머니는 가방 속에 고운 천혜향과 멜론을 담고 오셨다. 이미 제사상은 차려 있으니 뭐가 더 필요할까마는 어머니는 오래간만에 뵙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렸을 거였다.
저녁을 먹고 빙 둘러앉은 좁은 마루에 어른들은 역시나 고사리 무용담으로 대화의 불을 지피셨다. 새벽녘에 고사리를 따라 길을 가다 보면 빨리 가라고 뒤에서 빵빵 경적을 울려 댄다는 얘기, 가방이 넘쳐서 고사리를 꺾어 한 곳에 모아 두었다가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 자기가 딴 곳은 절대로 안 알려주면서 이모에게는 전화해서 꼭 따라온다는 옆집 얄미운 아주머니 이야기, 내 밭이다 생각해서 갔더니 밤새 싹 다 갈아엎어져서 새벽 걸음을 허탕 쳤다는 이야기. 어른들의 무용담에 웃고 떠들썩한 자리가 한두 시간 계속되었다. 이제야 제사가 예전처럼 그리 중요한 일로 여겨지지 않는 듯하지만 지금 이리 보니 바쁘고 정신없는 세상, 제사가 아니면 친척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 그런 제사가 있었다. 사촌 할머니도 오시지 않고, 육촌 할아버지도 오시지 않는 제사. 그냥 아버지 형제들과 자식들만 단촐하게 모여 지내던 제사. 까마귀 제사. 난 그 제사가 돌아올 때면 정말 좋았다. 괜히 일가친척 다 모이는 제사에 가면 올레길 들어가는 입구부터 떠들썩하기도 하고 오래간만에 친척들을 만나서 좋기도 했지만 종종 할머니들의 엄한 잔소리를 듣기 일쑤고, 공부는 잘하느냐, 상을 받았느냐에서부터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느니, 여자가 단정하게 조용히 있어야 한다는 할머니들의 눈치를 보느라 오래간만에 만난 사촌과도 신나게 놀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꼭 열 두 시를 넘겨야 해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제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날도 있었다.
그런데 까마귀 식게(제사의 제주어)엔 조카들을 예쁘게만 봐주시는 큰아빠, 작은아빠만 오시니 맘껏 떠들어도 되고, 먹고 싶은 것으로만 편식을 해도 되고, 평소에 잘 먹지 못하는 산적에 곱게 부쳐진 전을 양껏 먹고 큰 목소리로 얘기해도 누가 하나 뭐라 하지 않으니 그날 그 제사는 나에게 그저 작은 축제였다.
큰집에서 제사를 모시니 우리 집에선 제사를 할 이유가 없는데 매년 가을이 조금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엄만 제사상을 준비하셨다. 작은엄마와 큰엄마께서 오셔서 떡을 빚고 적을 구우며 이런 얘기 저런 얘기가 오가는 제사. 다른 제사에 비해 음식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작은 상에 소담하게 올려진 과일과 떡은 제사상에서 빨리 내려지길 원하는 아이들의 바람을 아는 듯 유난히 먹음직스러웠던 것 같다. 거기다 집으로 마당으로 사촌 동생들과 숨바꼭질도 하고, 엄마한테 편하게 어리광을 부려도 되는 우리 집 까마귀 식게.
한라도서관-어린이도서연구회 제주지회 '찾았다 재미난 우리 책' 전시장에서
그런데 왜 까마귀 식게일까? 사실은 '까마귀 식게'란 까마귀도 모르게 지내는 제사라고 한다. 까마귀까지도 알면 안 되는 제사? 그게 어떤 제사지?
나중에서야 성인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제사란 걸 알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하는 제사도 열세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빠의 동생 제사라는 것이다. 성인이 되어 보지 못했으니 결혼도 했을 리가 없고,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그 영혼을 보듬어줄 사람은 형제와 그 가족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까마귀도 모르는 제사'는 까마귀조차 알 수 없는, 아무도 모르게 지내는 작은 제사라고 하니, 자손이 없는 이들의 쓸쓸하고 조용한 제사였던 것이다. 그리고 때론 정말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죽음을 기리는 그 집만의 작은 제이기도 했다. 피치 못할 집 사정으로 다른 이들에게 알리지 못하거나 속솜해야(조용해야 하는, 입을 다물어야) 하는 누가 볼까 무서워하면서도 세상을 등진 그 영혼이 너무 가엾어서 넋이라도 위로하고 가족을 잃은 애통함을 기리는 그들만의 제사. 그것이 까마귀 모르는 식게(제사)였던 것이다. 죽어서도 맘껏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애끓는 마음이지만 슬픔마저 숨죽여야 했던 그 심정은 어땠을까?
제주도엔 한 마을이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집들이 있다. 그리고 남몰래 숨죽여 우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빨간 동백꽃은 해마다 피고 있고, 그렇게 벚꽃은 흐드러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