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누이는 외로웠다.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한 시간 이상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야 했던 밭으로 매일 출근해야 했던 어머니를 둔 죄(?)로 오누이는 학교가 끝나 집에 와서도 방학이라 온종일 집에 있어도 아버지 어머니는 우리 몫이 아니었다.
말이 없고 조용한 성격이어서 소심했던 남동생과 요망지고(?) 말 많고 붙임성이 좋았던 나. 그래서 언제나 놀이도 내가 주도하고 밤늦게 부모님이 돌아오셔도 내가 먼저 부모님 품을 차지했다. 그래서 엄마는 매번 뒤로 밀려나는 약한 아들이 안쓰러워 한번이라도 더 안아주시려 했고 한 마디라도 더 건네려고 하셨다. 그래서일까? 엄마는 집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는데도 하루는 아들을 위해 장어 한 마리를 사 오셨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던 젊은 엄마도 장어 요리를 해 본 적은 처음이셨던 것 같다. 장어 죽을 끓여 아들내미 몸보신시켜 주려고 큰 맘먹고 사 오셨는데 살아있는 장어를 펄펄 끓는 물에 넣자마자 갑자기 부엌이 난리가 났다. 우당탕탕 곤로 위 냄비를 탈출한 긴 장어가 꿈틀꿈틀 뱀처럼 흙바닥이었던 부엌을 헤엄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마도 숨통이 끊어지기 전 마지막 발악이었을 텐데...... 여기저기 꿈지럭거리며 기어 다니는 장어에 놀라 옴짝달싹 못하는 동생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엄마는 장갑으로 장어를 잡으려 했지만 자꾸만 미끄러져 달아나는 그놈을 잡지 못해 한바탕 난리를 떨어야 했다. 방에 있다가 달려 나온 나는 좁은 부엌에서 벌어지고 있는 소동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하고 깔깔대고 말았다. 그리고 누구에겐 불행이 나에게는 행운이 되었다. 몸보신할 양식으로 넣어주려던 그 음식(?)의 장렬한 마지막을 목격한 소심한 동생은 결국 한 술도 뜨지 못하고 장어는 온전히 내 차지가 되고 말았다. 그때는 동생만 챙기려는 엄마에게 화도 났지만 베지근한 맛이 일품이었던 장어 죽의 비릿함을 잊을 수가 없다.
동생은 그렇게 제 몫도 제대로 챙겨 받지 못했다. 굵은 까만 곱슬머리에 말똥말똥 눈동자의 동생은 엄마가 없는 긴 시간을 누나와 함께 해야 해서 그런지 내 뒤를 잘도 쫓아다녔던 것 같다. 하긴 동네 친구들을 사귀기도 전에 농장엘 가야 했으니 같이 놀 사람도 누나였고, 이야기 나눌 사람도 나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동생이 초등학교엘 들어가고 중학교를 들어가고 친구들을 만나고 키가 크는 동안 나에게 의지했던 누나보이는 사라지고 누나가 없어도 되는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친구를 몰랐을 땐 스펀지 요로 세모 모양의 집을 만들어 텐트를 만들고 빨래집게로 물고기를 만들어서 낚시를 하는 놀이도 했고, 말을 듣지 않는다며 어디서 배웠는지 빗자루로 엄마 흉내를 내가며 동생을 때리기도 했다. 그랬던 애가 언제부턴가 텔레비전 프로를 죽어라 양보하지 않고 나와의 말싸움에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동생에게만큼은 굳건했던 나의 성역에 서서히 구멍이 뚫리더니 어느 날 그렇게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즈음 우리 동네에 오락실이 생겼다. 삐용삐용 요란한 소리가 길가까지 들리고 돌기처럼 튀어나온 버튼을 오른쪽 왼쪽 움직여 가며 화면 안으로 빠져들 것처럼 웅크리고 앉아있던 동네 오빠들. 아니. 불량배들. 우리 엄마 아빠의 말에 따르면 오락실에는 불량배나 가는 거라며 오누이의 오락실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 호기심에 오락실 밖에서 기웃거리기만 하기를 여러 번. 아이들이 시끌벅쩍한 웃음소리와 요란한 기계 음향은 내가 놀고 있던 세상과 차원이 달랐고 오락실을 다녀온 아이들의 무용담은 오누이의 혼을 쏙 빼놓았다. 몇 달이 지나자 우리 동네에서 가지 않은 건 우리 오누이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뿐이었다. 엄마 아빠가 집을 비운 시간이 많았으니 우리에겐 '시간'이라는 무기와 '부모님의 부재'라는 도우미가 있었다. 돈이 있어야 했다. 오락실 가기가 꿈이 돼버린 오누이에게 책상 위에 있던 빨간 돼지 저금통은 큰 유혹이었다. 무엇에 홀린 듯 오누이는 저금통의 배를 가르기 시작했다. 플라스틱의 금을 힘껏 눌러 틈을 벌린 후에 동전을 꺼내는 일은 가슴 떨리는 일탈이었지만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면서 나는 슈퍼로, 동생은 오락실로 뛰어나갔다. 그러기를 며칠 하다 보니 저금통은 점점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금통이 가벼워지기 시작하면서 내 마음은 반대로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아빠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잘못을 고해성사했다. 아빠와 누나의 모습을 보던 동생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누나의 배신에 동생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울음을 터뜨리며 "누나가 먼저 시작했어~~"라며 울기 시작했다. 어이가 없던 부모님은 별말씀 없이 그 순간을 넘겨주셨던 것 같다. 이렇게 우리의 자수로 저금통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두고두고 아빠는 그때의 일을 되새김질하며 우리를 놀리곤 했다.
어느 크리스마스 날에는 동생이 선물이라며 신문지로 포장한 카세트테이프를 내밀었다. '민병철 영어'의 글씨가 조금 남아 있는 테이프였는데 재생 버튼을 누르는 순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졌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 아파서 집에만 있었던 동생이 매시간 라디오에서 나오는 캐럴을 녹음해서 선물을 만든 것이었다. 영어가 녹음되어 있었으니 녹음을 지우고,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다가 DJ의 멘트가 끝남과 동시에 녹음 버튼을 누르고, 다시 중단하고 다시 지우고 녹음하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생각하니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오누이란 이렇다. 성(性)이 다르니 관심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만 누나가 때론 엄마가 돼야 하고, 동생이 때론 오빠가 돼서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며 살아가는 사이인 것이다. 지금이야 딸 하나, 아들 하나인 집이 대부분이고 오누이도 흔하지만 7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때에 오누이는 흔한 관계는 아니었다. 그리고 오빠와 여동생인 경우보다 누나와 남동생인 오누이인 경우는 누나는 괄괄한 남성적인 반면에 남동생은 좀 더 조용하고 수줍은 편이 많았던 것 같다. 아니, 우리 경우 그랬다.
그 뒤 동생은 명문대도 갈 수 있으리라는 가족들의 기대를 과감히 저버리고 고등학교 도서관에서 카드에, 담배를 배우면서 공부를 안 하더니 결국 전문대를 가겠다고 통보하는 바람에 한 번 집을 왈칵 뒤집고, 작고 약한 줄만 알았던 내 동생이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여자 친구를 사귀더니 운전을 배워 전국을 일주하고 돈을 마련하기 위해 공사판 행을 무서워하지 않고 종횡무진 세상을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지금, 동생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며 지역사회 활동가로 아픈 부모님 대신 짬짬이 농사일도 해가며 자신의 오누이를 키우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세월은 이렇게 어릴 적 오누이를 독립시켜 자신의 일터를 만들어 주고 각각의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켰다. 그래서 그렇게 어릴 적 붙어있던 누나와 동생을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길 때나 연락을 하는 의무에 대한 부채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이상한 순위를 매기고 있다. 당연히 동생에겐 제 가족이 있으니 누나의 순위는 가족 뒤에 부모님 뒤에 누나일 텐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남의 남자가 되고 남의 아빠가 된 동생에게 부모님 다음 누나 그리고 그다음이 자기 식구라고 형편없는 순위를 매기고 있었으니, 점점 연락은 뜸해지고, 잘하는 줄 알면서도 바쁘다고 부모님께 소홀히 하면 밉고, 누나가 안중에도 없는 동생에게 야속함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누나에게 남동생은 하나이고 남동생에게 누나는 하나다. 자신의 가족이 넓어지고 또 다른 가족의 계보를 만들고 있어도 몇십 년 전 한 부모 밑에서 함께 자란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같은 뿌리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을 것이며 옆으로 밑으로 번지는 가족의 잔뿌리를 함께 가꿔나가야 하는 동지라는 믿음엔 유통기한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으나 다시 시간이 흐른 후엔 조금씩 가까워 질 수 있으리라는 데 의심의 여지는 없다. 그것이 오누이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순리일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