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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Oct 22. 2020

피아노 선율로 울리는 마지막 이야기 ​

-'아침의 피아'노를 읽고-

아침에 베란다에서 듣는 피아노 소리에 응답할 수 있는 건 세상에 남겨두고 쌓아둔 사랑이니 마음이 무겁고 흔들릴 시간조차 부족하다는 사람, 툭툭 꺾이는 마음을 추스르고 분노와 절망과 싸우던 사람, 더 성숙한 사랑을 갈구했던 사람, 남겨진 시간 동안 자신의 정신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환자의 당당함을 주장했던 그는 살고 싶고 일하고 싶었던 철학하는 사람 김진영이었다. 철학자 김진영의 '애도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동안 내가 읽고 생각하고 확신하고 말했던 그것들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 시간 앞에 나는 서 있다는 그런 생각"-41쪽


죽음 앞에 온전히 당당해질 수 있는 이가 있을까? 학자로서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역할을 잠시 멈추고 세상과 단절되었다고 느낄 때, 나만 외로이 다른 행성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우연히 둘러본 산책길에서, 매일 들락거리던 아파트 주차장에서, 운전하는 차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들에서 낯선 의미가 생기고 삶의 목적을 깨닫고 소박한 희망을 꿈꾸며 조그만 소원을 빌던 그의 모습에서 삶과 죽음이란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된다.    


"흘러가는 '동안'의 시간들. 그것이 생의 총량이다. 그 흐름을 따라서 마음 놓고 떠내려가는 일-그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자유였던가."-51쪽


 그는 자신이 상상하지 않았던 삶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그간 철학자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사회인으로서의 인성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지켜왔던 수많은 고민과 이야기들이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적인 문제 앞에서도 나약하게 쓰러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글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고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얘기하며 피해 버리거나 비겁하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쓰며 글로 음악으로 자신을 추스르고 있었다. 하지만 다짐했다가도 무너지고 일어서다가도 죽기보다 싫은 나태를 느끼고 희망을 갖다가도 그대로 주저앉아 버리는 그의 일상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사건처럼 읽는 내내 조바심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병과 함께 하는 것이,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르는 그 불안함을 잠재우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도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 앞에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어떻게든 끝까지 살아내야 하는 책임이라는 것에 경건함을 느낀다. 그래서일까? 그가 우울하거나 아프거나 절망할 때는 함께 무너지곤 했다. 아마 병원에 계신 엄마를 떠올리며 읽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 역시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무작정 이 땅에 발을 붙여야 한다는 맹목적인 신념으로 내 곁에 남아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가 그대로 물러서지 않음에 감사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아서 절망 속에서만 있지 않아서 감사했다. 그는 집 떠나는 엄마의 치마폭을 붙들고 놓지 않는 아이처럼 삶을 꼭 붙들려 노력했고, 자신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 애썼다. 그리고 한 번도 모든 것을 걸고 싸워보지 않았다 고백한다. 그것은 이번만큼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싸움에서 모든 것을 걸어 승리해 보이겠다는 결심이었으리라.


 "한 철을 살면서도 풀들은 이렇게 성실하고 완벽하게 삶을 산다"-81쪽


수명이 인간보다 몇십 배 짧은 풀도 자신의 삶을 다하기 위해 악착같이 땅에 붙어 푸르름을 더하지 않던가. 주어진 책임을 다한 후 한 세상 잘 살았다, 나의 의무는 여기까지다를 주장하며 소멸하지 않았던가. 아니,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또 다른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그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대해 성실한 채무자가 되어 그 임무를 다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환자임을 인정하고 환자의 정체성을 찾으려 하고 세상과 단절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환자는 투명한 주체이며 종결에 항복하지 않고 사랑의 주체이며 미적 주체라 얘기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다. 초연하려 하나 울컥하고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고, 좀 더 오래 살고 싶고, 희망을 노래하고 수치와 필름의 결과에 떨고 기뻐하고. 가족들을 걱정하고 사랑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려 하고, 잊혀지는 것이 두렵고, 남겨진 사람들이 걱정되고, 내가 남겨 놓아야 할 것이 걱정되는 사람. 그리고 시멘트 바닥을 천공하는 지렁이처럼 어머니 품 안으로 파고들고 싶은 어느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나는 나를 꼭 안아 준다. 괜찮아 괜찮아......"-145쪽


결국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이는 자신 뿐이었나 보다. 고독한 싸움을 견뎌내고 있는 그에게 몸은 통제불능의 위협자였지만 정신만큼은 어르고 달래며 함께 가야 할 동반자였다. 그래서 고비가 있을 때마다 자신을 다독거리고 칭찬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열흘 동안의 단식으로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걸으면서도 


"보행이 생이다. 나는 이 보행의 권위와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248쪽


 라며 자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하늘로 가는 것이 승천이니 나중에 자신은 날아오르게 될까라며 담담히 죽음에 대한 생각을 그렸다.  


투병 생활을 하는 이들의 글은 많다. 하지만 이렇게 절제되고 지적이고 깊이 있고 가슴 아픈 글은 별로 보지 못했다. 일상의 글에 철학을 담고, 철학의 그릇에 소소한 행복과 좌절을 버무린 철학 수필이라고 하면 될까?

내가 책의 말미를 달릴수록 작가는 죽음과 사랑과 아름다움에 대한 여운을 남기고 내가 읽은 페이지가 두꺼워질수록 작가의 글은 짧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과관계나 시간의 순서에서 벗어난 내용과 글보다 여백이 훨씬 많은 페이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내 마음은 편안하다'였다.


 난 이 한 마디가 진실이라 믿는다. 마지막이 편안할 수 있도록 그는 병상에 있는 동안 치열하게 고민하고 삶을 통찰하고 준비를 했을 것이다. 마지막에 후회가 없도록 글을 쓰고 퇴고하고 다시 읽었을 것이다. 그의 삶에 존경의 마음을 담아 보낸다. 나 역시 내 삶의 순간순간을 허투로 보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죽음 앞에 위인은 없다. 죽음 앞에 영웅은 없다. 오로지 죽음 앞엔 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인간이 죽음 앞에 당당해질 수 있고 죽음 앞에 편안해질 수는 있을 것 같다. 그처럼 삶을 사랑하고 삶을 존중하고 삶을 성실하게 살다 가려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그를 기억하는 모든 이들에게 소박한 철학자지만 큰 사람으로 남겨질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삶에 드리워진 어둠을 걷어내려 최선을 다했으므로 삶의 빛을 끝까지 비추려 노력했으므로 그는 죽음 앞에 영웅이요 위인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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