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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시나물 May 07. 2021

누가 꽃이고 누가 잡초일까?​

 그 집 마당은 작지만 아기자기하다. 20년 전에 지었던 집인데 그동안 남이 살다가 퇴직 일 년을 앞둔 지인이 다시 리모델링을 하고 들어갔다. 시내 번화가 아파트에 살다가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어떻게 들어갈 건지 걱정하는 모습을 봤는데 어느새 견적을 내고 수리 중이라더니 금세 뚝딱뚝딱 이사할 날이 되었다. 내 일이 아니라서 그런가. 남들의 시간은 알아서 빨리 가주는 것 같다. 벌써 제대구나? 하는 것처럼.


 집엘 들어서는 입구엔 작은 방사탑 모양의 돌무더기 두 개가 대문을 대신하고 있고, 오른쪽엔 꽃과 나무들이 무더기를 이루고 피어 마당 한 켠을  채우고 있고 왼쪽엔 작은 텃밭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한 귀퉁이엔 아궁이에 무쇠솥도 있어서 닭도 삶고 수육도 만들어 먹는다고 귀띔을 한다. 무섭지 않을까 적적하지 않을까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출근해서도 퇴근 시간이 언젠지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단다. 그렇게 그녀는 마당 있는 집의 매력에 푹 빠져 사는 눈치다. 그래서 그런지 일요일 아침 낭독 모임을 줌으로 할 때도 하루는 공부방에서 양배추 밭이 보이는 창가에서 했다가, 어느 날엔가는 부엌 식탁 자리에서 집 밖 도로를 보면서 책을 읽곤 했다. 그리고 휴일마다 주말마다 그 집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어느 날엔 오랜 친구들이 어떤 밤엔 나이 지긋한 큰 언니부터 동생까지 딸들만의 비밀스런 모임도 하고 가족들이 오붓하게 하룻밤 잠을 자기도 하고 친한 커피숍 사장님은 커피콩을 가지고 와 마당에서 커피를 내려 서쪽 하늘의 노을과 함께 바람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거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보면 가볼수록 마음이 시원하고 편안해지는 건 나만의 느낌일까?

  


 얼마 전 그 집에서 낭독 모임을 했다. 낭독은 뒷전인 채(그럴 줄 알았다) 소담스러운 반찬과 맛깔난 커피를 마시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도 하고 서로 소식도 전했는데 아무리 크게 웃고 떠들어도 걱정이 되지 않고, 듣고 싶은 음악도 눈치 보지 않고 즐길 수 있어 몸 안에 있었던 스트레스가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돼서 다른 회원들은 돌아가고 나는 그 집주인과 산책을 하기로 했다. 애월 바닷가 쪽으로 방향을 잡고 길을 걷는데 따가운 오후 햇볕인데도 바람이 함께 해서 그리 덥지는 않았다. 사람을 볼 수 없는 한적한 골목길은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고, 길가엔 햇볕을 받아 맵씨를 자랑하는 꽃들이 가득했다. 봄이라 그런가. 꽃들의 색깔이 유난히 선명하고 봄스러웠다. 노란색, 분홍색, 하얀색이 조화를 이루고 검은 밭담을 경계로 안쪽엔 옥수수가, 바깥쪽엔 마을 안길이 자리를 잡고 있고 고개를 들어 남쪽을 보면 푸른 바다가 뒤로는 한라산이 보였다. 사람들은 아직도 제 계절의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데 꽃들은 나무들은 계절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여전히 우리들은 쌀쌀한 봄에 패딩 조끼도 입고, 겉옷 하나쯤은 예비로 가지고 다니는데 꽃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싹을 틔울 때와 초록으로 겹옷을 입을 때와 꽃을 피울 알람을 지정해 놓은 모양이다.  


한참 길을 걸으며 예쁜 꽃에 감탄을 하다가 갑자기 예쁘다 칭찬받지 못하고 뒷전인 잡초에 눈이 갔다. 맨 초록색 외엔 그 어떤 색깔도 갖지 못한 잡초. 쓸모없다고 판단되거나 이익이 되지 않는, 이로움보단 해로움이 많은 식물이 잡초다. 그런데 문뜩 누구에게 이롭지 않다는 걸까? 누구에게 쓸모없다는 것일까? 반대로 꽃은 누구에게 어떤 이로움을 주고 어느 면에서 쓸모 있다고 인정해 주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는 길에 벗이 되어 주면 그만인 것을, 제자리를 지키는 것만으로 나에게 시원함을 주면 고마운 것을 꽃과 잡초를 가르는 기준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 듯하다. 물론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식량 증산에 도움을 주지 않고, 다른 작물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에 뽑히고, 약을 치고 파헤쳐지고 있지만 누군들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을까? 잡초라 불리는 그들도 그렇게 해야 삶을 살아갈 수 있기에 그들 나름은 최선을 다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잡초라 밟혀지고 손가락질을 받는 건 조금 억울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담 문제는 이 지구의 모든 기준과 규칙을 만들어 내는 인간에게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꽃은 꽃으로 태어났기에 존재만으로도 고귀하고, 잡초는 잡초로 태어났기에 눈총을 받는 세상, 하긴 인간이 사는 세상도 별반 다르지 않다. 태어날 때부터 꽃처럼 떠받혀지고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저런 사연으로 집 한 칸 없어 누울 자리 없는 이들도 많다. 어느 누구든 잡초이길 바라는 사람 아무도 없지만 또 잡초면 어떤가하는 생각도 든다. 숲을 이루는 데도 잡목이라 불리는 나무들이 한 부분 책임을 지고 있고, 바다엔 횟감으로 귀한 대접을 받는 물고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작고 야무지게 살아가며 잡어라고 취급받는 다른 생명체도 가득하다. 꽃이 꽃으로 빛날 수 있는 건 끈질기게 땅을 딛고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버티고 선 잡초가 있기에 더 눈에 띄는 것이 아닐까?


 한참을 그렇게 산책하던 우리 둘은 우연히 화원에 둘렀다가 본 노란 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길가에 지천으로 널려있어서 별반 신경을 쓰지 않던 것이 떡 하니 화분에 심겨 이름표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도 돈을 내고 사야 하는 꽃이었구나 하며 눈이 휘둥그레 진 것이다.  갑자기 꽃이라 하니 한 뿌리 캐다가 마당에 심고 싶고, 그렇게 다시 보니 그 꽃이 여태 몰랐던 생김새로 어여뻐 보이는 것이다. 꽃이라 생각했다가 그건 '맥문동이야'라며 맥문동을 화분에 심은 사람 처음 봤다고 웃어대는 친구 덕분에 하루아침에 화단 중앙에서 구석으로 밀어내는 건 또 무슨 이유일까?

결국 꽃인지 잡초인지 구별하고 편 가르는 건 인간의 마음 탓이다. 꽃이어서 꺾이고 꽃이어서 꽃병으로 화분으로 자유롭지 않고 잡초지만 제 터를 잃지 않고,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는다. 누가 좋고 누가 나쁘고가 없는 것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밖에 있던 화분이 걱정된 할아버지가 집 안으로 모두 들여놨더니 할머니는 꽃들이 얼어 죽을까 봐 물을 끓여서 줬단다. 모든 이를 소중한 꽃으로 볼 수 있는 건 이런 마음인 것 같다. 내 눈이 다른 누군가를 향할 때 꽃으로 볼 마음으로 보고 있는지, 잡초로 취급할 눈으로 보고 있는지 한 번 가늠해 볼 일이다. 아니, 잡초든 꽃이든 선입견 갖지 말고, 편견 갖지 말고 그 모습 그대로 봐줄 수 있는 눈이 있다면 그거로 됐다. 내가 꽃인데 잡초로 봤다고 서운하지 않고, 잡촌데 꽃으로 취급했다고 그리 기뻐할 일도 아니기에.

 오히려 사람들의 눈길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다른 이의 관심으로 크는 것보단 내 힘으로 차곡차곡 흙을 다져가며 단단해지는 자신있는 잡초가 되는 것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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