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글로리 / 친생자 추정
전재준은 정말 예솔이의 아빠가 될 수 없을까?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큰 인기 가운데 시즌 1을 마쳤고, 3월 시즌 2가 공개된다고 한다. 단숨에 정주행을 마무리하고 유투브의 여러 떡밥 동영상들을 보며 3월 8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일주일만 기다리면 되었던 기다림을 두달, 세달로 만드는 요즘 OTT 드라마들이란 원.. 밀당이 아주 장난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박연진은 하도영과 결혼해서 딸 예솔이를 낳아 기르고 있지만, 사실 예솔이가 하도영이 딸이 아닌 전재준의 딸이고, 유전자 검사로 이를 알게 된 전재준이 변호사 친구에게 자신이 예솔이의 아빠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묻지만 변호사 친구가 하는 말은 이랬다.
정말 전재준이 예솔이의 법률상 아빠인 친부가 될 수는 없는걸까?
전재준의 변호사 친구가 저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민법이 규정하고 있는 친생추정이란 것 때문이다. 우리 민법은 부와 자녀의 관계에서 일정한 요건을 갖추면 매우 강력한 법적추정인 친생추정을 인정해버린다. 매우 강력한 법적추정이란 실제 진실이 무엇이든, 사실관계가 어떻든 법이 이것이라고 강력하게 땅땅 도장을 찍어버린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법적추정을 통해 부자, 부녀관계를 인정해버리고, 이것을 깨뜨리는 것도 엄격한 요건하에서 소송을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법이 부자관계에 대해 이런 강력한 "도장 꽝꽝"을 인정해버리는 이유는 가족관계의 안정성과 특히 자녀의 지위의 보호하기 위한 면이 있다. 생물학적 출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모자관계와 달리 사실 부자관계는 어떤 증거도 없다. 우리들 누구도 아버지가 정말 나를 이룬 정자를 제공한 분 인지 유전자 검사를 해서 확인한 적이 없다. 그냥 아빠라고 믿고 살아왔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태어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유전자 검사를 할 수도 없으니 법률이 출산 시기, 혼인신고 시기를 기준으로 “이 때 태어난 아이는 출산한 엄마의 남편의 아이인 것으로 정해 놓을게”라고 도장 꽝꽝 해 놔 버렸다. 이것이 바로 친생자 추정이라는 법률상 추정이다.
친생자 추정이 되는 경우는,
1.아내가 혼인 중에 임신한 경우, 2.혼인신고 날로부터 200일 이후에 출생한 아이인 경우, 3.이혼신고 날로부터 300일 이내에 출생한 경우 친생자 추정이 된다. 이 세가지 중 하나에 해당하면 친생자 추정이 되어 출산한 모의 법률상 남편이 그 아이의 아빠인 것으로 인정된다. 예솔이도 아마 혼인신고 후 적어도 7개월 이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그럼 법률은 이제 예솔이를 출산한 박연진의 법률적 남편인 하도영이 예솔이의 친부라고 도장 쾅쾅 찍었고, 이제 누구도 함부로 둘의 법적 부녀관계를 깨뜨릴 수는 없다.
그럼 이 친생자 추정을 깨뜨릴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하도영이 친생부인의 소라는 것을 제기하는 것 뿐이다. 강한 법률상 추정인 만큼 깨뜨리는 것도 쉽지는 않다. 오로지 친부가 제기하는 친생 부인의 소를 통해 법원이 친생추정을 깨뜨리는 내용의 판결을 내려주어야 깰 수가 있다. 하도영은 예솔이가 본인의 딸이 아닌 것을 알게된 날로부터 2년 내에만 이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
물론 혼인신고와 출생일의 요건이 위 친생 추정 기간에 해당하더라도 외관상, 객관상 부의 아이를 가질 수 없음이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엔 친생추정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법률 규정이 너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기에 법원이 여러 사건들에 대한 판결 축적을 통해 조금 완화한 내용으로 정해둔 것이라 보면 된다. 이런 것을 판례라고 하는데, 판례에 따르면 예를 들면 남편이 행방불명되거나 장기간 수감, 입원, 외국체재하는 경우, 별거하면서 같이 살지 않았을 경우라면 위 친생추정이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하도영이 몇 년간 해외출장을 간 사이 예솔이가 태어났다면 친생자 추정은 없다. 그럼 전재준도 친생추정이라는 방해물 없이 친자관계부존재확인 및 인지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예솔이의 친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연진과 하도영이 이혼하게 되면 뭐 달라지는게 있을까?
정답은 아니오이다. 이혼과 친자관계는 별개의 문제이다. 부부가 이혼을 해도, 심지어 이혼해서 친권과 양육권을 뺐긴다고 해도 자식과의 관계엔 변화가 없다. 하도영과 박연진이 이혼을 하고, 엄마인 박연진이 예솔이의 친권, 양육권을 갖게된다고 해도 하도영은 예솔이의 친부인다. 하도영이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만약 이혼을 한다고 해도, 살인 범죄를 비롯 어마어마한 범죄들을 저질러 온(것으로 매우 강하게 예측되고 있는) 박연진에게 초등학교 저학년에 불과한 예솔의 친권, 양육권이 갈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실제 이혼소송에선 경제적 능력과 무관하게 양육권 면에서 엄마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 사실이지만 박연진의 경우는 법원도 엄마가 아이를 양육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특히 모든 과거가 드러나 실형을 선고 받고 박연진이 교도소에 수감되게 된다면? 법원은 무조건 아빠가 예솔이를 키우도록 할 것이다.
그렇게 더 글로리 시즌 2를 상상해본다. 지나치게 변호사의 시각일지 모르지만, 추악한 과거가 모두 드러나게 된 박연진은 영혼과 같은 딸 예솔을 잃고, 전재준 역시 예솔이를 딸로 찾아오지 못하게 될(됐으면) 것(좋겠) 같다.
문득 얼마 전 했던 친생부인의 소 사건이 떠오른다.
오래동안 키운 아들이 본인의 친아들이 아닌 걸 알게 되었던 의뢰인은 20년이 지나 찾아오셨고, 이제는 아들과 본인의 관계를 바로 잡고 싶다고 했다. 아들이 어렸을 때 유전자 검사를 따로 해봤으면서도 왜 그 땐 소송하시지 못하셨냐 물었더니, 그 땐 그냥 넘어가고 살자 다짐했다고 했다. 와이프가 죽일 듯이 미웠지만 키운 정이 워낙 커 하나 뿐인 아들과 남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참고 살기로 했었다고. 이후 와이프와 황혼 이혼을 하게되고 여러 일들이 겹치며 결심을 하고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게 된 것이었지만, 결과는 기각이었다. 아들이 아닌 걸 안 때로부터 2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친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친생추정이다. 1심 판결 후 항소하지 않기로 한 날, 깊은 한숨을 쉬며, 남의 아들을 대학공부까지 시키며 키우고, 이제 내가 죽으면 내 재산 상속도 해주어야 되는 것이냐 한탄하며 사무실을 나가시던 의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친생부인이라는 순간접착제보다 강력한 법률상 추정을 인정해 놓고, 그걸 잡아뗄 수 있는 기간으로 2년은 너무 짧은게 아닐까. 때로 너무 강력한 법률의 추정이 가혹한 면도 있는 것 같다.
예솔이의 아빠로서의 전재준에게, 그리고 그 의뢰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