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꽃, 매장된 뿌리

[Review]연극 '튤립'

by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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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전쟁 이후의 화단

전쟁의 상처는 총칼이 남긴 상처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학교 앞의 화단, 정성껏 우려낸 찻잔, 그리고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 묻히기도 한다.


극단 돌파구의 연극 <튤립>은 전쟁의 상흔이 어떻게 개인의 정신을 잠식하고, 더 나은 미래가 가능했던 찰나의 순간을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독약으로 오염시키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 극의 비극성은 악인이나 어떤 나라의 의지가 아니라, 시대가 주입한 편집증과 공포가 어떻게 구원 가능성을 꺾어 버리는가에 있다.


작품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 야마토가 연해주의 튤립 밭에서 한국인 산모를 죽이고 갓난아기를 훔쳐오는 데서 시작된다. 아이는 '쥬리프(튤립)'라는 일본식 이름을 얻고, 부유한 일본 가정의 외아들로 자란다. 쥬리프는 자신의 뿌리가 잘려나간 사실을 모른 채, 투명하고 순수한 청년으로 성장한다.


쥬리프는 학교 정원사로 일하는 한국인 나카무라 쿠로에게 이질적인 이끌림을 느낀다. 얼굴에 검은 페인트 자국이 있는 쿠로는 사실 쥬리프의 친부다. 쥬리프는 그를 집으로 초대해 자신이 그를 사랑하며, 그와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싶다고 고백한다. 관객 입장에서 모든 진실이 폭로된 이후 연출되는 두 남자의 포옹은,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자신의 근원인 흙을 만나는 필연적인 조우이자, 쥬리프에게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원초적 충동처럼 보인다.


무대 연출 역시 이 장면의 감정을 정적인 화해의 이미지로 그리지 않는다. 무대 중앙에 붉은 조명이 떨어지면 두 배우의 몸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격렬하게 얽히며 거의 싸움에 가까운 긴장 속에서 흔들린다. 언어 대신 신체의 충돌이 전면에 놓이는 이 장면은, 두 사람을 연결한 혈연의 힘이 얼마나 원초적이고도 간절한 것인지 육체의 리듬으로 전달한다.


야마토는 쿠로의 정체를 알고도 쥬리프의 결정을 묵인하며 '내선일체의 실패'를 인정한다. 제국의 논리를 수행했던 장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인정은 아이러니하게도 식민 권력 내부에 존재하는 미세한 균열을 드러낸다. 그러나 어머니 에리코의 반응은 다르다. 그녀는 한국인에 대한 역사적 공포와 보복에 대한 편집증에 사로잡혀 있다. 에리코에게 쿠로는 아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이 공들여 만든 완벽한 아들을 파괴할 위협이다. 그녀는 작별의 찻잔에 독을 타서 쿠로를 살해한다.


독살 장면 역시 앞선 포옹과 묘하게 호응한다. 에리코가 조용히 자리를 떠난 뒤, 무대 중앙에는 붉은 조명이 다시 떨어지고 독살당한 쿠로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 길게 이어진다. 타는 듯한 갈증을 묘사하는 배우의 긴 신체 연기는 사랑의 포옹에서 시작된 육체의 격렬함이 죽음의 경련으로 이어지는 순간을 보여준다. 피와 꽃의 색을 동시에 환기하는 붉은 빛 속에서, 사랑과 살해는 거의 같은 동작의 밀도로 뒤엉킨다.


살해당한 쿠로의 시체는 같은 한국인 가정부 미호에 의해 흙으로 덮인다. 가해자의 공포가 저지른 범죄를 피지배층의 손으로 매립하게 만드는 잔인한 구도다. 진실이 땅 밑에 묻힌 줄도 모른 채, 쥬리프는 또 다른 비극의 성지인 히로시마에 발령받은 후 쿠로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기다린다.


미호는 돌아오지 않는 쿠로를 기다리는 쥬리프를 바라본다. 모든 비극과 은폐를 목격한 그녀가 무거운 비밀을 터뜨리듯 "근데"라고 입을 떼는 순간, 연극은 끝난다. 전쟁의 당사자가 아닌, 전쟁의 상처가 남은 쥬리프와 미호의 입에서 나오는 “근데” 이후를 생각하는 것이, 전쟁 이후의 우리에게 연극이 던지는 질문이다.


2.뿌리가 잘린 꽃, 쥬리프

주인공 '쥬리프'는 연해주의 튤립 밭에서 약탈당한 구근이다. 일본군 장교 야마토가 산모를 죽이고 훔쳐온 이 아이는, 일본의 부유한 가정이라는 화분 속에 심겨 '훌륭한', 야마토의 말에 따르면 ‘완벽한 일본인’ 소년으로 길러진다. 여기서 비극은 소년의 무지에서 발생한다. 그는 자신의 뿌리가 뽑혀나간 자리에 흐른 피를 보지 못한다. 가해자를 아버지라 부르며 꽃을 가꾸는 소년의 순수함은, 그 자체로 식민 지배가 꿈꾸는 완벽한 성공 사례이자 가장 잔인한 폭력의 결과물이다. 쥬리프의 아름다움은 ‘내선일체’의 이상향일 것이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행해진 에리코의 살인은 단순한 소유욕이나 모성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국 일본이 피지배 민족에게 가졌던 뿌리 깊은 ‘보복에 대한 공포’가 발현된 형태다. 그녀는 끊임없이 독립운동가의 테러와 한국인의 피해의식을 경계한다.


역사적 가해 행위는 가해자의 내면에 '언젠가 되돌려 받을 것'이라는 트라우마적 불안을 심는다. 에리코에게 쿠로는 아들의 친부가 아니라, 자신의 견고한 낙원을 무너뜨릴 ‘오염된 과거’일 뿐이다. 그래서 쿠로가 자신의 아들을 사랑하며 키워줘서 고맙다는 가장 비참하고 아름다운 감사를 표하고, 최소한의 경의—쥬리프의 부모로서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달라는—를 요구하고, 심지어 자신이 키우는 튤립의 구근을 건네주고, 그의 아들을 위해 떠나겠다고 했음에도 그녀는 그를 살해한다.


친부인 나카무라 쿠로의 얼굴에 칠해진 '검은 페인트'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자, 전쟁이 남긴 추한 진실이다. 그리고 쿠로와 쥬리프의 포옹이 튤립의 구근처럼 끈질긴 생명력, 뿌리와 흙의 원초적이고 슬픈 해후였다면, 에리코의 독살은 그 모든 뿌리를 영원히 매장하려는 권력의 의지다. 그녀가 내뱉는 "내선일체는 가능하다"는 선언은 피지배계급의 흔적을 말살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제국주의적 환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진실(쿠로)은 죽어 흙이 되고, 가공된 꽃(쥬리프)만 남기는 방식이다.


3.역사적 트라우마와 에리코

하지만 그 망상은 정말로 실현되었을까? 쥬리프가 결말의 지점에서 향한 곳이 '히로시마'라는 점은 상징적이다. 히로시마는 일본에게 피해자로서의 기억을 재구성하는 성지다.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역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는 경험을 해야 했다. 에리코의 살해는 그래서 끊을 수 없는 굴레를 상징한다.


연극 <튤립>에서 재현하는 비극이 더욱 시린 이유는 쥬리프라는 새로운 세대가 제시한 대안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와 민족의 경계를 지우고 쿠로를 ‘사랑하는 동반자’로 받아들이려 했다. 야마토 역시 내선일체의 실패를 인정하며 이 결단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적 상흔에 절여진 에리코의 정신은 그 유토피아를 믿지 못한다. 전쟁이 남긴 재는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가장 안전한 길(살인과 은폐)을 택하게 만든다. 가능한 미래를 과거의 망령이 잡아먹는 순간이다. 같은 방식으로 역사는 같은 구도를 반복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모두 차가운 흙 속에 묻어버린다.


4.'근데'

쿠로의 시체를 같은 한국인인 미호가 흙으로 덮는 장면은 이 연극의 가장 잔인한 장면 중 하나다. 미호의 행위는 동족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진실을 매립해야만 했던 피지배층의 생존 트라우마를 상징한다.


화려한 튤립(쥬리프) 아래에는 독살당한 진실(쿠로)이 묻혀 있고, 그 위를 덮은 것은 같은 상처를 공유한 자의 손이다. 이 구조적 비극은 해방 이후에도 우리가 마주해야 했던 지워진 역사들의 메타포다.


하지만 작품은 미호의 입을 닫아놓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미호는 돌아오지 않는 쿠로를 기다리는 쥬리프를 바라보다가 끝내 입을 연다. 그 말은 긴 고백도, 설명도 아니다. 참아온 침묵이 터지듯 내뱉는 한 마디, “근데.” 묘하게 힘이 실린 그 말이 무대 위로 쏘아지듯 던져지는 순간, 연극은 더 이상의 말을 허락하지 않은 채 끝난다. 마치 진실이 막 발화되려는 찰나에 시간이 잘려 나간 것처럼.


이 부조리를 견디지 못한 신음 같은 그 말은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전쟁의 당사자가 끝내 넘지 못한 벽을, 당사자가 아닌 자들이 넘어설 수 있을까. 연극은 바로 그 질문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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