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 존재의 추상
눈앞에 얼음으로 만든 컵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컵이 맞는가? 이번에는 그 컵이 녹아버렸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아직도 컵이 맞는가? 컵은 음료 따위를 담아 마실 수 있음에 그 본질이 있다. 그렇기에 얼음 컵은 녹아서 컵의 본질이 사라지는 순간 컵이 아니게 된다.
그런데 녹아버린 얼음 컵은 대체 어느 시점부터 컵이 아니게 되었을까? 아니 애초에 ‘컵’이란 것이 존재하긴 했을까? 대체 컵이란 무엇인가. 액체 따위를 담아 마실 수 있는 도구가 컵이라면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접시나 냄비는 왜 컵이라 불리지 않는가. 어째서 가장 많은 물을 담고 있고, 항상 마실 물을 제공하는 지구는 컵이라 불리지 않는가. 허튼 생각 같지만, 이러한 사고를 반복하다 보면 컵이란 것의 정의가 매우 모호하며, 주관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 사실 컵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예로 숲을 생각해보자. ‘숲’이란 보통 식물들이 군집을 이룬 공간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식물들이 대체 몇 개체나 모여 있어야 식물 군집을 숲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또한 숲의 식물들은 얼마만큼의 밀집도를 갖추어야 숲이 되는가. 마찬가지로 이러한 사고를 이어가다 보면 실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하나의 독립된 식물들일뿐이며, 숲이란 내가 주관적으로 정의한 존재의 추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컵의 재료였던 '얼음'도 컵이나 숲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얼음이란 물 분자들이 고체 결합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물 분자가 가진 열에너지가 적어 잘 진동하지 않고, 분자 간의 결합이 쉽게 끊어지지 않는 조건에서, 물 분자들이 꺾인 육각형의 조직으로 차곡차곡 결합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물 분자가 숲의 나무들처럼 많지 않다면, 또한 그 물 분자가 숲의 식물처럼 치밀하게 모여 있지 않다면, 또한 모여 있더라도 내가 규정한 규칙대로 배열해있지 않다면, 그것은 얼음이 아닌 무엇이다. 곧, 얼음조차도 물 분자들이 가질 수 있는 수많은 집합 형태 중 일부를 범주화한 추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면 물 분자는 어떨까? 화학적으로 물 분자란 두 개의 수소원자와 하나의 산소 원자가 결합한 형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컵이 녹아내리듯 원자 일부가 분자에서 이탈하거나, 또는 컵에 뚜껑을 붙이듯* 다른 원자가 추가로 달라붙게 되면 물 분자라는 존재도 사라질 수 있다. 물론 물 분자는 얼음 컵과 달리 일상적인 열에너지의 변동만으로는 쉽게 와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에너지의 다른 형태인 전기충격으로는 쉽게 분해될 수 있다. 혹자는 경우가 얼음컵과 전혀 다르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어떤 물질 간의 결속이 상호전환 가능한 에너지에 의해 깨어진다는 점에서 두 경우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컵과 숲과 얼음과 물 분자를 비롯한 세상 모든 것들은 어떤 근원적 존재의 결합상태를 주관적으로 범주화하고 정의하여 만들어낸 존재의 추상이다. 그 추상에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기준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언제나 존재의 경계엔 그 정체성을 혼란하게 만드는 회색지대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컵과 접시의 경계가 모호하고,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가 모호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