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4 나는 누구인가
어제 빵과 물과 고기이던 물질이 오늘의 나를 이루고, 또 오늘 나를 이루는 물질은 장래 내가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또한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른 것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존재이다. 이처럼 나의 육신과 생각은 지속적으로 변하는데, 나는 언제나 나를 나로 의식한다. 그렇다면 혹시 인간에게 물질세계를 초월하여 나를 나로 의식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
역대의 많은 학자들이 인간에게 이러한 초월적 의식이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많은 고찰을 하였고 그 안에서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종교와 철학이 있는데,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종교 중 하나인 기독교는 ‘초월적 의식’과 ‘의식이 머무는 세계’를 각각 ‘영혼’과 ‘천국 또는 지옥’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또한 위대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존재에 관한 고찰을 통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존재를 의심하자면 세상에 진정 믿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나, 최소한 나의 생각, 곧 의식만큼은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식은 물질이나 에너지처럼 그 존재를 관찰할 수 없기에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또 무엇보다 의식은 개인마다 또는 생물마다 표현방식이 너무나 다양하여 일반화하기 어렵다.(사람의 의식조차 이해하기 어려운데, 풀이나 나무 따위의 의식체계는 어찌 분별하고 이해할까.) 따라서 이 논쟁에 대해서는 모두가 죽는 그날까지 정답이 없다. 그래서 때로 이 논쟁은 종교 전쟁으로서, 때로는 철학 논쟁으로서 예부터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의식의 존재를 오랜 기간 증명할 수 없음에도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의식의 존재를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논쟁이 일어날 만큼 의식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단지 ‘알 수 없다’로 치부하기에 의식은 너무나 또렷하며, 물질세계에 사는 것은 의식에게 너무나 고통스럽다. 이에 여러 선자들은 물질이 아닌 초월적인 세계에 집중하게 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수많은 것들이 본디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왔다. 잃기 전에 모든 것은 얻었던 것이며, 그것들은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갈 뿐이라고 말이다.